학교에서 배우는 30년대 만주 독립운동사는 어렵네요. 30년대 독립운동사가 어려운 이유는 흐름을 빼고 왜곡까지 시킨 역사만 배우기 때문이야. 중국정치변화의 흐름을 빼고 민족계열 역사만 넣었으니 암기로 때려넣을수 밖에 없었던 거죠..


 


 


30년대 만주항일전쟁은 3단계로 나눌수 있어.


 


 


1단계는 31년 만주사변부터 36년 시안사건까지의 항일항쟁이야. 


 


1단계 시기를 이끈 것은 민족계열이나 공산계열도 아닌 항복하지 않은 국민당군(장학량의 북양계열)이야. 일명 구국군이지. 1단계 초기에는 민족계열이나 공산계열 모두 독자적인 항일전쟁이 아닌 구국군 산하 "특무영"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게 돼는데..


 


일제의 진압강도가 강해지면서 35년부터 유격전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유격전에 강한 빨갱이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국공연합" 형태로 바뀌게 돼. 이른바 빨갱이들의 통일전선전술이 사용된 거야.


 


 


2단계는 37년부터 41년까지는 동북항일연군이 항쟁을 이끄는 시기야.


 


장학량이 장개석에게 항명하고 국공 합작해서 일제와 싸우자고 강요한 서안사건을 계기로 모든 구국군이 항일연군에 통합돼. 항일연군은 지휘관과 정치장교 2중 지휘체제였는데 정치장교를 무적권 빨갱이가 잡았어. 항일연군은 눈 깜짝할사이에 빨갱이군대로 변모하게 되지.


 


 


3단계는 41년부터 광복까지 항일연군이 소련으로 도망가서 빌붙어 사는 시기야. 37년 2만명까지 늘어났던 항일연군은 일제의 공세를 이기지 못했고 500명까지 줄었다고 해. 일소평화조약으로 인해 중국땅에 가서 분탕치지 않는 조건으로 더부살이 한거야. 


 


 


 


안타깝지만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이나 이청천의 대한독립군은 30년대 항일항쟁에서 주류가 아닌 조그만 지류에 불과했어. 대한독립군은 북만에서 1년 싸우고 안돼겠다 싶어 중국으로 돌아가고 조선혁명군은 남만에서 2년 싸우다 양세봉이 암살된후 빨치산에 흡수되지. 


 


 


만주사변이 터지자 장개석은 선 빨갱이 후 일본이라는 원칙을 만들어. 빨갱이부터 진압하고 일본을 상대한다는 구상하에 만주국민당군에 무저항을 명령하지.반면 중국공산당은 만주사변을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로 봤어. 중공은 32년 주보중,양정우,조상지,리조린 등을 만주로 파견하는데 최용건한테는 낙하산이 떨어진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