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에 나오는 믿기지 않는 엽기적 사실들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이… 실록에 나오는 믿기지 않는 엽기적 사실들

 

신윤복의 ‘선춘야흥’ 에는 담뱃대를 문 기녀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랄 만한 사실이 많다. 이런 사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록을 밑바탕으로 한 책과 방송 내용, 전문가의 추천으로 ‘엽기적’ 사실을 모았다. <편집자〉

1) 조선시대 초기에 일본 왕이 선물한 □□□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요즘 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서술돼 있다. 태종 당시 일본 국왕이 코끼리를 바쳤다.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 말을 관리하던 사복시라는 관청에서 길렀는데 날마다 콩 4∼5두를 소비해서 관리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전 공조전서(판서에 해당) 이우가 태종 12년 코끼리에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실록의 내용을 보면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 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으며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라고 하는 기상천외한 상황이 묘사돼 있다.

‘세종실록 오례의’ 에는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술잔의 모습이 있다.

코끼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라의 중요한 국사도 많을 터인데 코끼리에 대한 보고가 계속 왕에게 올라왔다. 병조판서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를 전라도 섬에 두었다(태종 13년·1413년). 그런데 수초를 먹지 않아 육지로 옮겼다(태종14년). 이 기록은 세종으로 넘어간다. 전라도 관찰사가 충청도·경상도롤 옮겨줬으면 하는 보고를 올린다(세종 2년). 하지만 코끼리는 충청도에서 또 사고를 저질러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채여서 죽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는 다시 바다 섬에 있는 목장으로 옮기자고 건의한다(세종3년). 이들의 보고서에는 ‘나라에 이득이 없습니다’ ‘일년에 먹이는 콩이 수백 석에 이릅니다’라는 말이 입을 맞춘 듯이 들어가 있다.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으면 관찰사들이 이런 보고를 올렸을까, 상상해 볼 만하다. 아쉽게도 세종3년 이후 그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과연 일본에서 온 코끼리가 한국에서 잘 적응하고 살았는지는 궁금증만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관찰사의 보고서 중 가장 명구(?)는 전라도에서만 키우는 것 때문에 피해를 본 전라도 관찰사가 ‘왜 우리만 피해를 보느냐’는 내용의 보고다.

세종2년(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답: 조선시대 초기에 일본 왕이 선물한 ‘코끼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2) 조선시대에 □□를 단속했고, 이때 □□도 오고갔다.

자동차가 부를 상징하는 요즘처럼 조선시대에는 이동 수단인 가마가 부를 나타냈다. 벼슬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을수록 당연히 가마는 호화로웠다. 이런 이유로 관원들이 가마를 단속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 뇌물을 받아 말썽이 인 적도 있었다. 요즘이나 그때나 일부 단속관원들은 재량을 넘어서서 가마를 타고 가는 여인네의 얼굴을 보는 재미에 빠져들기도 했던 모양이다.

경기도 양주 대장금테마파크에서 직접 타볼 수 있는 가마.

정조4년(1780) 3월18일
정언(正言) 이제만(李濟萬)이 아뢰기를,
“여염의 젊은 아낙이 법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면 찾아 잡아서 감죄(勘罪)하는 것은 본디 법례가 있는데, 너울을 벗겨 보고 예쁘고 못난 것을 지점(指點)하며 조례가 다그쳐서 금품을 받아내는 것이 비일 비재하니, 형조 참의 이평을 파직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답: 조선시대에 ‘가마’를 단속했고, 이때 ‘뇌물’도 오갔다.


3)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에게도 □□□이 있었다.

시험에 합격하면 ‘한턱’을 내야 하는 것은 고유의 전통인 듯하다. 벼슬을 얻은 신참자를 신래자(新來者)라 이름하는데, 신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면신례(免新禮)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신고식이 가혹해 폐단이 심했다. 음식 접대도 접대지만 요즘의 룸살롱 같은 곳에 선배를 모셔다 기생을 안겨줘야 했다. 신고식을 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병을 얻을 정도라면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신고식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중종 36년(1541년) 12월 10일
헌부가 아뢰기를,
“(…) 가져다 쓰느라 허비하는 물건 값이 수만 냥이 되는데 신진(新進)인 빈한한 선비들이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면 구걸하여 빌려주기를 청하기를 서울이고 외방(外方)이고 할 것 없이 하여, 오직 눈앞의 급한 대로만 하고 염치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은 간혹 부유한 장사치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이 일을 의뢰하기도 하니, 몸을 망치고 이름을 떨어뜨리는 짓을 함이 이처럼 심합니다. 또한 침학할 때에는 되도록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더러는 겨울철에 물에다 집어넣기도 하고 한더위에 볕을 쪼이게 하기도 하므로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답: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에게도 ‘신고식’이 있었다.


4) 세종은 □□경기를 즐겼다.

조선시대 왕이 즐겼다는 격구는 말을 타고 채로 공을 치는 경기를 말한다. 오늘날 폴로경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격구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머지 하나가 오늘날 골프와 유사한 형태의 경기였다. 세종실록에는 태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내정에서 격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날씨가 추워 교외에는 나갈 수 없어 내정에서 이 놀이를 했는데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야 그쳤다고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골프채와 공에 대해 자세히 설명돼 있다.

세종 3년(1421년) 11월 15일
“구를 치는 방법은 편을 나누어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치는 몽둥이는, 모양은 숟가락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 한데, 물소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두꺼운 대나무로 합하여 자루를 만들었다. 구의 크기는 달걀 만한데, 마노 혹은 나무로 만들었다. 땅을 주발과 같이 파서 이름을 와아(窩兒)라 하는데, 혹은 전각을 사이에 두고, 혹은 섬돌 위에, 혹은 평지에 구멍[窩]을 만든다. 구를 치는 사람은, 혹은 꿇어앉고, 혹은 서서 구를 치는데, 구가 혹은 날아 넘어가기도 하고, 혹은 비스듬히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구르기도 하여, 각기 구멍 있는 데의 적당한데 따라서 한다.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게 되는데, 그 절목(節目)이 매우 많다.”


답: 세종은 골프경기를 즐겼다.


5) 조선시대에도 □□는 남자가 있었다.

신윤복의 ‘월하밀회’. 달밤에 남녀가 밀회를 나누는 것을 한 여자가 몰래 보고 있다.

중종대 지방 군수 허지의 아내 유씨는 투기가 심해 남편을 욕하고 때리기도 예사롭게 했다. 남편을 받들어야 하는 조선시대에서는 감히(?) 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진 것. 허지는 ‘매맞는 남편’의 시조가 아닐까. 허지가 매맞는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실록에 유씨가 ‘이웃집 수탉이 암탉을 쫓다 자기 집으로 날아들자 그 수탉을 잡아 죄를 따지기를 너의 집에도 암탉이 있는데 또한 이웃집 암탉을 쫓아다니니 이는 역시 허지와 같은 것이다’라며 닭의 날개를 뽑고 사지를 분해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허지가 바람을 피워 유씨가 투기(妬忌)를 하게 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남편에게 투기를 한 유씨의 혐의도 뚜렷한 증거는 없으나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서술돼 있다. 하지만 삼강오륜을 강조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 조정에서 유씨 건을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유씨를 감옥에 넣어 취조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유씨는 무려 7번이나 실록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됐다. 반대 의견은 간음 또는 남편 살해 혐의도 아닌데 사대부 여인을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아내’로 상징되는 유씨는 의금부의 조사를 받게 되나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조정에서는 ‘매맞는 남편’인 허지가 이혼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중종 17년(1522년) 6월 15일
헌부가 함문(글로 물음)하기를 허지의 아내 유씨는 허지와 투기(妬忌)할 때, 능멸하고 구욕(毆辱·때리고 욕을 함)하기를 사생(死生)을 헤아리지 않고 하여, 볏짚으로 사람처럼 만들어 놓고 사지(四肢)와 몸통을 절단하되, 이것이 허지다 하며 비자(婢子)들로 하여금 마당에서 치하(致賀)하게 하였고,


답: 조선시대에도 ‘매맞’는 남자가 있었다.


6) □□는 조선시대에도 백해무익했다.

담배가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광해군일기. 남초(南草)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남쪽인 일본에서 왔다는 것에서 유래된 이름. 실록에 ‘데뷔’한 것도 그렇게 좋은 내용이 아니다. 부산에서 불이 났는데 원인이 담배였던 것이다. 담배가 사람들에게 기호품이 되자 비옥한 농토에 담배를 경작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담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한가지 유익한 점이라고는 청나라에 수출하는 대표적인 상품이라는 것. 병자호란 이후 끌려간 사람들을 다시 사 오는데 담배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광해군 15년(1623년) 2월 15일
동래(東萊) 왜관(倭館)에 화재가 발생하여 80칸을 모두 태웠다. 임술년에도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왜인들이 담배를 즐겨 피우니 떨어진 담뱃불로 화재가 일어난 듯하다.


답: 담배는 조선시대에도 백해무익했다.

참조/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 (일빛), ‘조선왕조 상식여행’(도서출판 이토),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청년사), KBS 스펀지

추천/ 노회찬 의원, 김영현 씨(대장금 작가), 정창권 초빙교수(고려대 국문과), 임천환 사료연구위원(국사편찬위원회)

 

윤호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