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국군의 날을 바르게 찾자


이미 임시정부의 직속군으로서 광복군 창건일인 9월 17일이 참다운 국군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국권을 상실한 바 있었기 때문에 주권국가로서의 군의 전통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주권 회복을 위한 민족적 의지와 노력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러한 의지와 노력이 연면히 이어져오는 그 맥락을 되짚어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항일의병투쟁의 역사
 
을사늑약에 우리 민족은 반일 의병투쟁을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의병투쟁이 없었던 군(郡)은 전국의 240개 군 중 불과 열 손가락 미만이었다 한다. 1907~8년, 2년 동안 의병에 참여한 수가 113,920명이고, 충돌 횟수는 1,451회이고, 살해자는 1908년 한해에 11,562명이라고 당시 일제는 극히 축소하여 발표했다.

이와 같은 전국적 의병투쟁은 이인영(李麟榮) 대장과 허 위(許蔿) 군사장의 제안과 지휘로 두 차례나 서울 대탈환 작전을 전개하는 등 민족적 의지를 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병활동만으로 당시 세계적 수준의 최정예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극히 일부의 양심적 양반층을 제외한다면 주류의 양반 사회 전체가 일제하의 친일 지주로서의 사회 경제적 위상에 자족하며 매국적 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호남지방만 하더라도 호남 대토벌 작전을 두 번씩이나 종횡(縱橫)으로 전개하여 30만이나 학살했다. 당시의 호남 인구를 150만으로 추정한다면 5사람 중 한 사람씩을 죽인 꼴이 된다. 실로 씨를 말리는 인종 청소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독립군 투쟁

 

이후 일제강점 하에서도 의병투쟁의 연장선상으로 1915년경까지 북부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강대한 무력과 무단 통치에 견디지 못하고 북부 국경지대와 만주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북방기지로의 이동과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북방기지에 독립군을 창건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는 전략은 1911년에 이미 만주의 봉천에 신흥무관학교를 시작으로 동림무관학교, 밀산무관학교 등이 세워지면서 본격화되었다.
 
3.1.독립운동과 더불어 고조된 민족의식으로 1920년경에는 실로 40여개의 무장단체들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일본 군 측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공이 24회에 달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기록에 의하면 1920. 3. 1부터 6월 초까지 국내 진입 유격활동이 32회에 달하였으며 함북 온성의 미산 헌병주재소를 습격 섬멸한 것은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독립군들의 국내진공작전에 약이 오른 일제가 국경을 건너 독립군을 소탕하겠다는 작전을 전개하다가 도리어 역습을 당한 것이 봉오동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내고 완전한 참패를 당했다. 이때의 독립군 부대는 대한 북로독군부로서 최진동, 안 무 지휘하의 홍범도 군사령부였다.

봉오동전투 후에 일제는 만주의 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중국군을 동원,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토벌이 실패하게 되자,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직접 간도에 침입해서 독립군을 발본색원하여 소탕하겠다는 작전의 전개과정에서 청산리독립전쟁이 치러진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본군은 2만 5천의 병력을 동원하고 관동군까지 지원토록 하여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 부대를 동서남북으로 넓게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그 포위망 안에서 다시 주력 1만 2천명의 병력을 3개 지대로 나누어 오지까지 수색해서 독립군 부대를 섬멸한다는 방대한 작전이었다.
 
대한독립군은 김좌진 장군 지휘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 600명과 홍범도 지휘하의 연합군 1300여 명이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군은 원격 포위망을 구축한 조건 위에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5,000명의 최정예부대로 하여금 1920년 10. 20일을 기하여 총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청산 독립전쟁은 백운평전투,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촌 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골짜기전투 등으로 연결되는 전투과정에서 일본군의 전사자 1,200여 명(상해임시정부 군무회의 추산)을 낸 독립 전쟁사의 금자탑이었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무장독립운동

일제가 1931. 9.18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켜 무력으로 괴뢰국 만주를 강점해나가자 동북 만주지역에서는 한국 독립당과 그 당군(黨軍) 한국 독립군이 반만 항일(反滿 抗日)의 기치아래 1,600여명의 교민이 응모하여 “한국 독립군 유격 독립여단”으로 발전하여 한중 연합작전으로 쌍성보전투, 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 대전자령전투, 동령현성 투 등의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내부의 사상적 갈등으로 1934년까지 밖에 존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청천 장군 등이 가담하여 광복군으로 연결된다.

한편 남만주와 한만 국경지역에서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한중 연합작전으로 영능가성전투, 대소 200여회의 전투를 전개하고 흥경성전투의 대승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총사령 양세봉이 일제 간첩에 의해서 암살당하는 불상사를 당하여 조선혁명군 정부를 수립하고 한중 항일동맹회와도 동북항일연군과도 합동작전도 감행하였다.

조선혁명군은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하여 끈질긴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조선총독부는 그들이 검거하거나 보고받은 조선혁명군의 국내진입 건수를 1932년에 16차 101명, 1033년에 10차 142명, 1934년에 40명, 1935년에 27명, 1936년에 9명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된 것만으로도 이보다 몇 배가 많으므로 이상의 통계는 검거한 경우의 통계로 간주된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정치통합의 기반조성)과 광복군의 창설 및 조선의용대의 통합(군통합)

 

 

상해사변(일제의 상해침공) 이래 중국 각지를 전전하던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게 되자 김 구 주석의 지휘아래 1940년 9.17. 광복군을 창설하고 해방 후의 건국을 위한 “건국강령”을 1941년 11월 28일 발표하였다.

건국강령의 특징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원칙으로 하되 정치 교육부문에서는 선진적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경제부문에서는 일부 사회민주주의 원칙을 도입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정당 사회단체들의 강령과 정책을 수용했다.
 
선 정치통일 후 군사통일을 원하는 민족혁명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김 구 주석은 특유의 지도력을 발휘하셔서 1938년 10. 10에 창립한 조선의용대를 1942년 12월 5일에 흡수, 통합하여 1943년에는 “광복군 통수부 주석 김 구, 총사령 이 청천, 부사령 김원봉, 제1지대장 김원봉 (겸임),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 영문 표기를 ”Korean National Army" 라 표기하였다.

이어서 1942년 10월 20~23일 의정원 의원 23인의 보선을 실시하여 조선민족혁명당 9인, 조선민족해방동맹 2인, 조선혁명자연맹 2l인 등 13인의 좌파정당 단체의원과 그밖에 무소속 의원들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전체의원 46인 중 한국독립당 29인(62%), 좌파가 17인으로 38%의 비율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연합정부로의 개편은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정부조직을 위한 개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1944년 4월 20일 제 4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통과시키고 이에 의거하여 주석에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 구를 재선하고 신설된 부주석에 조선민족혁명당 위원장 김규식을 선출하였다.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9개항 행동 준승 때문에 사실상 순조로운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고 화북지방에서 주로 활약하던 조선의용대에 대해서도 중공 8로군으로부터 선전 공작대 이상의 활동을 금지당하였고 영도권까지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김일성 최용건 등이 참여했던 “동북항일연군” 및 “조국광복회 활동” 역시 그 애국 열정에도 불구하고 망령 같은 “민생단”사건으로 사실상 괴멸 일보 전까지 이르렀던 수난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민중의 서러움 그것이었다.

그처럼 간난고초를 당하면서 한번도 자주독립의 민족적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까지 명시하고 있으면서 광복군의 창군 이념은 찾을 길이 없다.
 
국군의 날을 바로 찾는 것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적 통일의 실마리를 푸는 길로도 될 것이다. 참된 국군의 날은 9월 17일임을 거듭 확인하는 바이다.

 

ⓒ임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