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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훈 임정요인 후손 성묘단 단장과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 회장은 애국열사릉에서 유족들이 성묘에 참여하지 못한 엄항섭, 오하영, 유동렬 등 인사의 묘에 후손을 대신해 성묘를 했다.

 

성묘단은 재북인사릉에 있는 이광수, 정인보, 백상규 등 유명인사의 묘를 둘러보며 추모하기도 했다.

 

한 참가자는 김상덕 선생 묘와 이광수 선생 묘, 장현식 선생 묘와 김의한 선생 묘 등이 각각 바로 옆에 배열된 것을 보고 "서로 같이 계셔서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파 이광수 행적 :  네이버 지식인 자료 펌 >

 

 이광수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국민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1943년 12월 일본 유학생의 학병지원 권고강연에 나섬


이광수는 조선 문인협회 회장과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따르자는 황도학회 발기인 대표를 비롯,

 

 임전대책 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대화동맹, 조선언론 보국회, 대의당 등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많은 글을 써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였다.


독립 운동가를 숙청하라고 건의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 시베리아 등지의 2천여 유랑자들(실은 독립운동가들)이 지닌 위험성을 세 가지로 나눠서 경고한다면서,

 

첫째는 '독립운동을 표방해서 무기를 들고 조선 안에 몰래 들어오는 일'이며, 다음은 '과격파 러시아의 선전자가 되는 일'이고, 그 다음은 '사기꾼 또는 절도, 강도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춘원은 이들이야말로 '수효에 있어 적은 것 같지만 그 실제로 일본의 국방 및 사회의 안녕에 대해 경시해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까지 강변한다.

 

민족개량과 문화주의로 일관하던 춘원은 1937년 일제의 동우회(수양동우회가 1929년부터 동우회로 명칭이 바뀜)사건 구속에 걸려 옥고를 겪지만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한편, 정신적인 지주 도산의 타계(1938)에 직면한다.


이어 그는 1939년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한 모임(북지황군위문작가단) 결성식의 사회를 맡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제3단계의 친일행위로 들어선다.

 

즉, 춘원의 친일은 제1단계가 1919년 이전까지로 이 시기는 주로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정신으로 볼 수 있고,

 

제2단계는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이후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적인 욕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념체계인 민족개량주의와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던 때이며,

 

이어 제3단계는 1939년 이후로 이 때는 전시협력체제로 흔히들 친일이라고 하면 이 시기에 국한시 키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그 앞 시기가 더 중요한 역사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생활의 혁신은 생활의 황민화, 생활의 합리화, 그리고 생활의 임전화(臨珽化)의 3대 강령에 의하여야 한다고 주장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 감정, 풍습, 습관 중에 비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 순화하는 것이다.

 

 예하면 혼상의례의 일본화, 가족·친척 관념의 일본화, 경신숭조(敬神臣祖) 천황 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라고 주장.([반도민중의 애국운동], {매일신보}, 1941. 9. 3)

 

창씨 개명에 대한 이광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창씨의 동기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향:금년 8월 10일까지 조선인의 창씨의 기한이 끝난다.

 

그날의 결과는 정치적 영향에 큰 관계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 2400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에 철저하였다는 중대한 추리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에 반하여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불과하면

 

그것은 불행한 편의 추리자료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신임하고 아니함이 조선 자신의 행·불행에 크게 관계가 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적인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 2. 20)

 

해방후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호하는 [나의 고백] 이란 글에서 "애국을 위해서 친일했다"라는 궤변·망언을 늘어놓다가 6·25때 납북되었다.


(출처 : '이광수와 홍난파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