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진격 투쟁' 배후에 있던 청년 이명박

 

1964년 6월 3일 오후,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청와대 길목에서 군경과 대치하며 "굴욕외교 중단하라", "박 정권 물러가라"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군경과 대학생들 사이에는 트럭으로 만든 바리케이트가 놓여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경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해 비밀리에 협상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다.    

 

    ▲ 6-3 시위 모습 1964년 6월3일 대학생들이 청와대 길목에서 '굴욕외교 중단하라' '박 정권 퇴진하라'라고 외치며 트럭으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경과 대치했다. ⓒ 역사비평사 6 3 시위

 

44년 전, 청와대 앞의 모습이 지금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은가?

 

전경버스 대신 군용 트럭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졌다는 것 말고는 놀랄 만큼 닮아있다.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통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룬 박정희 정권과 '한미 FTA 체결'을 위해 굴욕족인 쇠고기 수입 협상을 하고 '한미 외교 정상화'를 이룬 이명박 정부의 모습 또한 닮아 있다.

 

이 닮은 꼴 시위에서 44년이 지난 뒤 서 있는 위치가 극적으로 달라진 사람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지금 이 대통령은 청와대 안에 앉아 우려스런 눈으로 촛불집회를 바라보고 있다. 경제대통령을 자처하는 그는 "1만명 촛불을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하는지 보고하라"라는 말 한마디로 국민들로부터 '천냥빚'을 얻었다. 그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역시 시위대와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나 44년 전 '청년 이명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 밖에서 청와대 안에 앉아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밀실 외교를 규탄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은 '청년 이명박'은 6·3 시위를 대규모로 준비하고 추진하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 세대의 당연한 의무였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4년 6월 3일 정오를 기해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해 대규모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기로 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의 수립과 전달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야 했으므로 은밀하게 추진되었고, '청년 이명박'은 그 중심에 있었다 라고 이 대통령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회고 했다.

 

당시는 야당과 사회단체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지방을 돌며 정부의 비밀 회담을 비판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3월 24일 서울시내 대학생 5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이날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대일 굴욕 외교 반대'에서 '군사 정권 타도'로 이슈가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81명이 부상하고 288명이 연행되었다.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던 '청년 이명박'은 고려대에서 있었던 '주체성을 잃은 굴욕적 대일 외교 반대 선언문' 발표에 관여하는 등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이유를 <신화는 없다>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양국 간의 민족사적인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는데 단순한 경제 논리로 덮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다. 일제가 사과를 하고 들어와야 할 성격의 일이지, 우리 쪽에서 먼저, 그것도 밀실 협상을 통해 손을 벌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민족적 감정이 용납할 수 없다. 군사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현실적 필요에서 파악한 데 견주어, 학생과 대다수 국민은 이 문제를 민족사의 장구한 흐름 위에서 파악하고 있다. 군사정권의 판단은 조급하고 졸속적이다."

 

제법 의로우면서도 합리적인 이 분석은 바로 '청년 이명박'의 냉철한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1964년 6월 3일 정오, 서울 시내 대학생 1만2천여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4·19 못지않을 열기였다. 겁을 집어먹은 당국은 이날 저녁 8시를 기하여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배후에 바로 냉철하고 추진력있는 '청년 이명박'이 있었다.

 

계엄 당국은 서울대학교의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그리고 고려대학교의 이명박 이 경우 박정훈 등을 이날 소요의 주동자로 지목해 수배령을 내렸다. 이날 이후 '청년 이명박'은 길고 어두운 도피의 나날을 보냈다. 결국 서울시경에 찾아가 자수를 했지만 '국가내란 선동죄'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구속되었다. 이후 '청년 이명박'은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 6-3 시위 관련 재판정의 이명박 대통령 6-3 시위 관련해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가운데) ⓒ 자료 6-3 시위

 

44년이 지났다. '대통령 이명박'은 '청년 이명박'에게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경제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박정희 정권의 빈곤한 논리를 명쾌하게 논박했던 '청년 이명박'에게 한미 FTA 체결을 통한 경제발전을 위해 국민의 안전을 담보잡힐 수밖에 없었고 검역 주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가 먹혀 들어갈까?

 

지금 '대통령 이명박'은 촛불집회의 배후를 밝히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배후 세력은 두 명이다. 한 명은 다음 아고라에서 탄핵서명을 주도한 인물인데,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밝혀졌다. 다른 한 명은 5월 17일 휴교 문자를 보낸 인물인데, 재수생으로 밝혀졌다. 마지막 배후는 처음 청와대 진격을 주도한 세력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추정컨대, '취객'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 이명박'은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답은 '청년 이명박'에게 있는 것 같다.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의 배후에 있던 그가, '청년 이명박'의 눈으로 본다면 '굴욕적인 한미 쇠고기 협상' 반대 데모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깨우칠 수 있으리라. 힌트를 주기 위해 그가 대일 밀실회담을 비판하며 썼던 논리를 그대로 쇠고기 협상에 대입해서 옮겨본다.

 

"국민의 식품 안전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는데 단순한 경제 논리로 덮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미 국교 정상화는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다. 쇠고기 협상은 미국임 먼저 안전 대책을 제시하고 들어와야 할 성격의 일이지, 우리 쪽에서 먼저, 그것도 밀실 협상을 통해 손을 벌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민족적 감정이 용납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현실적 필요에서 파악한 데 견주어, 학생과 대다수 국민은 이 문제를 민족사의 장구한 흐름 위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판단은 조급하고 졸속적이다."

 

진짜 아이러니컬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