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세계백과사전에서 '부가티(Bugatti)'를 검색하면 '에토르 부가티;1881년 9월15일~1947년 8월21일, 이탈리

아의 경주용 자동차 제작자'로 표기돼 있다. 지금은 부가티라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부가티는 자동차 제작

자였다.

 

 



EB110 베이롱

 

 


 이탈리아 밀란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부가티는 예술적 감각과 천재 엔지니어로 17세인 1898년 최초로 네

바퀴 자동차를 만든 장본인이다. 이 차는 후에 부가티 최초의 모델이란 의미로 '타입1(Type1)'이라 불렀다. 그

후 1901년 밀란오토쇼에서 두 번째 모델 '타입2(type2)'를 선보였는데, 부가티는 당시 이 모델로 밀라노시장 대

상과 프랑스모터클럽 명예상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명해진 그는 1902년 독일로 건너가 오스트리아 디이

트리히(Dietrich)자동차회사에서 디히트리히-부가티란 이름으로 '타입3, 4, 5'를 100여 대 제작했다. 계속해서

'타입6,7,8,9'를 만든 후 1909년 그는 프랑스령 몰스하임(Molsheim)에 자신이 직접 자동차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오늘날 부가티의 시작인 셈이다.

 

 

 

 



부가티 엠블럼

 

 

 


 ▲예술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지나치게 아름답다거나 너무 비싸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부가티가 자동차를 만들며 늘 강조했던 말이다. 이 같은 철학을 토대로 부가티와 아들 장 부가티(Jean

 Bugatti)는 항상 독특한 디자인의 수많은 투어링카와 경주용차, 그리고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그 중 1924년 유

럽 그랑프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직렬 8기통 2.0ℓ 엔진의 '타입35(Type35)' 경주차는 20년대 유럽 내 모든 경

주를 휩쓸며 부가티의 명성을 단번에 드높인 모델로 기억된다. 타입35는 특히 드럼 브레이크와 휠이 일체형으로

제작돼 뛰어난 제동력을 발휘했고, 경량화로 무게 대비 출력이 우수한 모델로 평가받았다. 아울러 '예술과 기술

의 완벽한 조화'라는 부가티의 철학이 잘 반영된 차종으로 지금까지 클래식카 수집가들로부터 고가에 거래될 만

큼 인기를 끌고 있다. 2년 동안 참가한 경주에서 100번 넘게 우승했고, 1926년에는 유럽 내 그랑프리 12경기를 모

두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차

 

 

 


 타입35가 유럽 경주를 휩쓸며 부가티의 기술적 명성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 부가티는 자동차경주와 조금 거리가

먼 예술중심적 자동차 만들기에 돌입한다. 크기나 배기량 등 모든 면에서 초호화 럭셔리 컨셉트를 지닌 '타입41

르와이얄'은 부가티의 대표적인 고급차로 등장했다. 처음부터 왕족이나 부호를 위해 제작됐으며, 무게 2.5t, 길이

 6.7m, 직렬 8기통 12.7ℓ 300마력 엔진과 3단 변속기가 탑재됐다. 2단에서 최고시속 145㎞를 발휘했고, 마스코트

로는 거대함을 상징하는 코끼리를 썼다. 그러나 워낙 호화차라 한 대를 만드는 데 제작비와 기간이 너무 길어 결

국 여섯 대만 제작됐고, 현재는 미국에 네 대, 독일에 한 대, 그리고 국내에 한 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

00년 기네스북에는 지난 1986년 '부가티 르와이얄 1931년형 베를린 드 보이지' 모델이 미국 미시건주 토머스 모

내건에게 810만 달러(약 11억 원)에 판매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타입41 르와이얄 이후 부가티는 '작은 왕족(Little Royale)'이란 뜻의 '타입46 리틀 로열'을 400대쯤 생산했다.

이어 그의 아들 장 부가티가 디자인한 '타입57(Type 57)'은 부가티 모델 중 유일하게 1937년과 1939년 두 차례에

걸쳐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우승하는 등 3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부가티는 경주 우승으로 자신들의 기술력

에 확신을 갖게 됐고, 이 기술은 곧바로 다음 모델에 적용, 발전하는 형태를 취해왔다.

 

 

 

 

 



타입35

 

 

 

 


 부가티의 상징인 말발굽 모양 라디에이터 그릴은 타입35와 르와이얄을 지나 1936년 생산된 부가티 쿠페에 처음

 나타났다. 부가티는 쿠페 모델의 스타일링에 공을 들여 그릴을 새롭게 만들었고, 이는 부가티의 상징으로 지금

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이 차는 경주에서 축적된 기술이 가장 많이 적용된 모델로도 유명하다. 경주에서 얻은 기

술의 상품화에 유명한 페라리도 부가티의 기술에는 고개를 숙였다고 전해진다.

 

 

 

 

 

 

 


타입37

 

 


 ▲부가티의 몰락

 

 그러나 부가티도 다른 자동차회사와 마찬가지로 1939년 터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1939

년 에토레의 아들 장 부가티가 르망 경주용차 타입57을 테스트하던 중 사망하면서 고비를 맞는다. 여기에 전쟁

의 여파로 1947년 에토레 부가티마저 타계하자 결국 1956년 '타입252'를 마지막으로 모든 생산을 중단하고 말았

다. 그러나 타입252는 세상에 나오기도 전 공장이 문을 닫아 실제는 8기통 230마력짜리 그랑프리 경주용으로 제

작된 '타입 251'이 부가티의 마지막 모델인 셈이다. 1909년 창업 이래 47년 만에 문을 닫은 몰스하임(Molsheim)

공장에선 모두 7,950대(Type12~Type101)가 생산됐고, 이후 부가티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후 1963년 초대형 고급차 메이커인 히스파노 수이자(Hispano-Suiza)로 인수됐다가 다시 몇 년 후 프랑스 국

립 항공국(SNECMA)으로 주인이 바뀌어 부가티는 비행기 엔진 부품사로 변신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가티는 사

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뛰어난 모델, 수집가들의 선호대상 1위 모델 등으로 살아 있다.


 

 


르와이얄

 

 


 부가티를 잊지 못해 부가티 부활작전을 펼친 인물은 바로 부가티 마니아였던 이탈리아의 로마노 아르티올리

(Romano artioli)였다. 이탈리아 동북부와 독일 남부지방에서 경주용 스포츠카로 유명한 페라리와 일본 스즈키

딜러로 큰 돈을 벌게 된 아르티올리는 80년대 후반부터 부가티 재건 작업에 들어가 결국 1987년 부가티 아우토

모빌리를 설립했다. 이태리 모데나 근교에 세워진 부가티 아우토모빌리는 1956년 몰스하임 공장을 폐쇄한 이래

31년 만의 일이었다.

 

 아르티올리는 부가티의 재기모델 이름을 설립자 에토르 부가티의 이니셜을 앞세운 'EB' 시리즈로 정했다. 이에

따라 부가티 아우토모빌리(Bugatti Automobili)는 1987년 설립된 후 에토레 부가티 탄생 110주년 기념 모델로

'EB110'을 선보였고, 후속 모델인 'EB110S'까지 발표했으나 재정난에 부딪치며 1996년 파산하고 말았다. 부활작

전을 편 지 10년을 넘기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EB시리즈 제작에는 당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12기통

엔진설계와 개발은 파울로 스탄지니가 도맡았다. 그는 당시 이태리 람보르기니의 12기통 엔진설계자이자 제작자

로 유명했다. 아울러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와 치제타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을 맡았다.

하지만 이들 세 명은 얼마 가지 않아 꿈을 접어야 했다.

 

 

 

 

 


타입41 르와이얄

 

 


 ▲부가티의 재기

 

 당시 폭스바겐 피에히 회장은 부가티의 몰락을 예의 주시했다. 주로 중소형차 생산에 집중해 오던 폭스바겐으

로선 초대형 럭셔리급의 모델이 필요했고, 부가티는 이를 메워 줄 좋은 브랜드로 여겼던 탓이다. 피에히 회장은

부가티로 벤츠, BMW 등에 맞서기로 하고, 1998년 부가티를 전격 인수했다. 부가티로선 두 번째 재기인 셈이다.


 

 

 

 


 

타입44

 

 

 


 폭스바겐은 부가티 인수 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1998년 파리오토살롱에 선보였던 'EB118 컨셉트카'에 이

어 현재의 '베이롱'까지 부가티의 고유한 정체성은 잃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폭스바겐 인수 후 나

왔던 '18기통이 탑재된 4번째 모델'의 '부가티 18.4 베이롱'은 폭스바겐 디자인 센터 책임자인 헬무트가 중심이

된 특별 팀이 관여했을 만큼 폭스바겐이 심혈을 기울인 차다. 이들은 에토레 부가티가 추구했던 '예술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고성능 스포츠카 컨셉트를 더했다. 베이롱이란 이름은 스포츠카 컨셉트를 강조

하기 위해 부가티로 과거 레이스계를 주름잡았던 레이서 피에르 베이롱에서 따왔다. 1939년 장 피에르 위밀과

함께 타입57을 타고 르망 24시간 경주에 출전, 우승을 차지한 인물로 당시 부가티의 성능과 특성을 가장 잘 이해

한 레이서로 전해지고 있다.

 

 부가티는 지금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 옛날 유렵 경주를 휩쓸던 기술력과 호화로움의 상징으로 대변되

는 명성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다. 몰락한 브랜드를 살리는 데는 새로운 브랜드 하나를 만드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부가티는 지금도 독특한 예술성과 경주에서의 강력한 성능 등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과거 부가티의 이미지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까. 폭스바겐의 과제이자 부가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제81회 제네바모터쇼에 등장한 부가티, 기억에 오래 남는다.

 

 

 



타입47


 

 

 


타입57 스텔비오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


 

출처 - 오토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