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개통된 고속도로로, 지난 1970년 완전 개통됐다.

 

 서울 서초구를 출발해 부산 금정구를 잇는 총 연장거리 416.4km에 걸쳐 있으며, 48개의 나들목, 15개의 분기점, 20개의 터널, 33개의 휴게소를 보유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단일 노선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교통량과 가장 긴 노선을 보유하고 있는 고속도로로, 국토를 대각선으로 완전히 가로지르고 있는 특성상, 해안 노선의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전 노선의 고속도로와 접촉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 경부고속도로의 태동기..반대 무릅쓰고 건설 강행

 

[사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초기 구상 스케치


 고속도로는 지난 1950년 국토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그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1960년 국토 건설 본부가 설립되고 장면 내각에 의해 본격적인 국토 개발 사업이 실시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1964년 서독을 방문해 독일 아우토반을 목격한 후 고속도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씨는 “박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달리다 몇 번이고 차를 세웠다”며 “고속도로의 노면 상태, 중앙 분리대 구조, 진출로 등을 일일이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고속도로 구상도를 직접 스케치 할 정도로 고속도로 건설에 열의를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67년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이 발족됐으며, 이후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사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의 박정희 전 대통령 (제공: 국가기록원)


 당시엔 재원 조달 방안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됐는데, 정부는 이에 따라 주요 기관들에 예산안 제출을 지시했다. 당시 건설부는 650억원, 육군은 490억원, 서울시가 180억원, 현대건설이 380억원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해외 고속도로 공사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을 발탁, 당초 현대건설이 제시한 공사비보다 높은 430억원을 책정하고 1968년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각계의 우려의 목소리와 비판에 직면했다. 고속도로 건설 논의에 들어간 1967~1968년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는데,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 비용을 가뭄 대책비로 요구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야당은 지역 편중론을 들며 고속도로 건설에 있어 호남 지역이 배제됐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정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했다. 호남고속도로가 착공된건 이후 1970년이었다.

 

[사진] 경부고속도로 (제공: 국가기록원)


■ 가장 싼 값에 가장 빨리 건설된 고속도로..비판 여론은 여전

 

 1968년 12월 경부고속도로 한남-수원 구간이 개통됐으며, 며칠 후 수원-오산 구간을 개통했다. 착공 10개월 만에 수도권 구간이 완공된 것이다.

 

 이후 1969년 9월 오산-천안 구간이 개통됐으며, 그 해 12월 천안-대전 구간이 완공됐다. 부산까지 완전 개통을 이룬 건 그로부터 1년 뒤인 1970년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이후에도 줄곧 비판에 시달려왔다. 당시 자동차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며, 물류 운송에서도 경부선 철도가 운송 효율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사진] 경부고속도로 천안구간 (제공: 국가기록원)


 운송 효율이 높아지기 시작한 건 1970년대 후반이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 경부선 철도의 운송 효율을 추월했다.

 

 경부고속도로는 또 도로를 보수하는 데에만 건설비용을 상회하는 비용이 소모됐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콘크리트 도로가 아닌 아스팔트 포장으로 건설돼 보수비용이 많이 들어간 것이다.

 

 이 밖에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77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특히 최대 난구간으로 평가되던 청주-옥천간 70km 구간은 발파를 진행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토사 퇴적층이었는데, 최초 공사에서 3명이 사망했다.

 

 이 구간은 현대건설이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현장에 전격 투입하는 등 흑자를 포기하고 개통을 맞추기 위해 공사 속도를 끌어올려 개통 예정일 이틀 전에 완공시켰다.

 

[사진] 경부고속도로 (제공: 국가기록원)


■ 경부고속도로의 독특했던 기록들

 

 개통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은 서울 한남대교였다. 이후 2001년 전국 고속도로 체계가 정비되며 부산 구서 나들목이 공식적인 기점이 됐으며, 2002년부터는 서울 한남대교 남단에서 서울 양재 나들목으로 종점이 변경됐다.

 

 이후에는 한남-양재 구간을 경부고속도로 노선에서 제외시켰으며, 서울시 관할의 경부고속도로 시내 구간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교통정체에 대한 기록은 눈길을 끈다. 개통 이후 8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자동차가 보급됨에 따라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사진] 경부고속도로 비상착륙훈련 (제공: 국가기록원)


 특히 명절에는 현재 이상의 교통체증을 유발했는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는 서울-부산 구간의 소요시간이 22시간에 달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는 왕복 4차선 도로였는데, 이후 경부고속도로 서울-대전구간이 확장된 후에도 평균 소요 시간은 17시간에 육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밖에도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당시 노면 중앙 분리대가 존재하지 않는 구간이 있었다. 지금은 교통량이 많은 죽전-신갈 구간이 그것인데, 이는 유사시 군사 목적용 활주로로 활용되거나 항공기의 비상 착륙을 위해 설계된 용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 전용차로제 도입, 제한속도 상향, 제2 경부선 건설 논의도...

 

[사진] 경부고속도로 (제공: 국가기록원)


 지난 1994년, 경부고속도로에는 국내 최초로 버스 중앙차로제가 도입됐다. 최초 양재-신탄진 구간에 설정된 버스 전용차로는 이후 청원-양재 구간의 상행선에도 도입됐다.

 

 이후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과 남부터미널을 오가는 고속버스의 이동 편의를 위해 시점을 한남 나들목까지 연장했다. 이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는 고속 및 광역버스 소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2010년엔 100km/h이던 제한속도를 양재-천안 구간에 한해 110km/h로 상향했다. 이 밖에도 교통량에 따라 갓길을 주행 차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가변차로제도 함께 시행했다.

 

 한편, 경부고속도로는 아시아태평양경제이사회(ESCAP) 결의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유럽을 연결하는 ‘아시안 하이웨이’ AH1 노선에 편입된 상태다.

 

 

박홍준 기자   hjpark@dailycar.co.kr

출처-데일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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