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우리집은 난생 처음 자가용을 장만했다. 그해 여름 기상관측 역사상 87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에도 네 식구는 차를 끌고 전국여행을 떠났다. 차를 멀리하게 된 건 시민 5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지존파 사건이 터지면서다. “야, 너희 아빠 차 지존파가 타던 차랑 똑같네!” 친구의 말처럼 범인 일당의 르망과 우리 차는 모양도, 색깔도 똑같았다. TV에서 성수대교 붕괴 장면을 본 뒤로는 공포증이 생겼다.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널때면 다리가 후들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1994년의 일이다. 별 것 아닌 이야기들도 드라마 하나로 주목 받는 때다. 1994년 자동차에 얽힌 사건들을 돌아본다.

 

진짜진짜 국산차

 

 1994년 봄 국내 자동차 업계는 떠들썩했다. 100% 독자기술로 개발한 최초의 국산차가 탄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주인공은 현대자동차의 소형차 엑센트. 현대차는 차량의 핵심인 엔진과 변속기, 디자인까지 모두 국내 기술로 개발했다고 자랑했다. 당시만 해도 현대차가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기술을 배워오던 때여서 국산차라고 해도 국산화율은 60~70% 수준이었다. 엑센트는 엑셀 후속모델로 탄생한 야심작이었다.

 

 

 프로젝트명(개발명)도 BMW를 의식한 듯 ‘X3카’였다. 1989년부터 4년4개월 동안 3500억원을 투입해 만든 엑센트는 현대차가 독자개발한 뉴 알파엔진을 장착해 최대출력 96마력, 최고속도 180㎞를 냈다. 빨강, 연보라, 진보라, 연녹색 등 X세대가 좋아할 만한 촌스럽고 강렬한 색깔도 입혔다. 광고모델(사진)로 당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이문세, 이수만, 유열 3인방을 캐스팅했다. 얼굴이 말을 닮았다고 해서 ‘마삼(馬三)트리오’로 불리던 세 남자의 출연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엑센트는 그해 광고상과 히트상품상을 휩쓸며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현대차 vs 기아차 자존심 경쟁

 

지금은 한지붕 한가족, 형제가 된 현대차와 기아차는 원래 둘도 없는 원수(?) 지간이었다. 툭하면 서로 비방하고 난투극을 벌였으니 나중에 한집 살림을 할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대표적인 것이 연비 뒤집기 사건. 출시 전 같은 1300㏄급 현대차 엑센트 연비가 기아차 아벨라보다 1.6㎞/L 가량 낮았는데 출시 이후 엑센트의 연비가 높아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엑센트가 먼저 공인기관인 국립에너지환경연구원에서 연비 16㎞/L를 받았는데, 기아차 아벨라가 나중에 연비 17.6㎞/L를 통보받았다. 이 정보를 입수한 현대차는 전자제어장치(ECU)를 조정해 다시 주행 테스트를 받아 연비를 18.8㎞/L로 끌어올렸다. 이 사실을 몰랐던 기아차는 ‘아벨라 연비가 동급 차종 중 국내 최고’라고 광고했다가 망신만 당했다. 이 일 이후 두 회사의 사이가 한때 악화되기도 했다.

 

자동차 전쟁

 

 1994년 12월 국내 자동차 시장에 전쟁이 벌어졌다. 현대, 기아, 대우, 쌍용 등 기존 4개사와 호시탐탐 자동차 사업 진출 기회를 노리던 삼성과의 4 대 1 싸움이었다. 정부가 삼성의 승용차 사업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은 사실상 기존 업체들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오랜만에 똘똘 뭉쳐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고 삼성의 진입을 저지할 대책을 협의했다. 임직원들도 일손을 놓고 파업을 벌였다. 삼성까지 진출하면 5파전이 벌어져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그럼에도 삼성의 야심은 대단했다. 외제차 100여대를 들여와 연구를 시작했을 정도다. 그때 들여온 차종은 닛산 맥시마, 도요타 캠리, 혼다 레전드, 포드 토러스, 벤츠 E300 등이다. 주변의 방해공작에도 삼성은 그해 일본 닛산과 자동차 기술도입계약을 끝내고 자동차 사업을 밀어붙였다. 결국 1995년 4월 부산 신호공단 55만평 부지에 자동차 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그렇게 싸워 이겼는데, 결국 르노에 넘겨주고 말았다.

 

 승용차 판매 100만대, 월급 100만원

 

 1994년 국내 승용차 판매 100만대 시대가 찾아왔다.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는 현대차 쏘나타2(16만4000여대)였고 다음이 현대 엘란트라(15만2000여대)였다. 현대 엑센트(8만8000여대)는 출시되자마자 3위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기아 세피아(8만6000여대)와 대우 프린스(6만8000여대)가 각각 4,5위에 이름을 올렸다.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부문에서는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의 갤로퍼(3만3000여대)가 부동의 인기를 누렸고 쌍용차 무쏘(2만5000여대), 기아 스포티지(1만4000여대)가 뒤를 이었다.

 

 

 자동차 판매가 급격히 늘던 상황이어서 자동차 업종에 대한 인기도 높았다. 생산직 근로자 평균 임금은 조선(133만원)에 이어 자동차(113만원)가 처음으로 100만원을 넘어섰다. 1993년 생산직 전체 평균 임금은 77만1000원이었다. 노조의 힘이 세서 근무 여건이 좋았던 것도 인기 요인이었다. 차도 잘 팔리고 연봉도 높은 자동차 회사는 ‘신의 직장’이었다. 당시 소형차 가격은 600만~700만원 선. 월급쟁이들이 평균 10개월치 월급을 모아야 차 한 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중대형차 가격은 3500만~4000만원이었다. 1994년 출시한 대우차의 3200cc급 대형차 아카디아(사진)와 현대차 그랜저 3.5는 4000만원이 넘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출처-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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