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만행에 열받아 있는 보배드림 눈팅족입니다. 저희 조상님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대장 정문부 장군님으로 이순신 장군님 버금가게 활약하신 분이지만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신것 같아 글을 씁니다. 글 내용은 인터넷에 퍼온 글입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서울을 순식간에 점령한 뒤, 군을 나눠 한 쪽은 평안도, 다른 한 쪽은 함경도로 치고 올라갔다. 평안도에 있는 왜군은 명군과 조선군이 몰아냈지만, 함경도의 경우에는 관군이나 명군의 지원이 없어 자발적인 방법, 즉 '의병'으로 이 사태를 해결했어야 했다. 이때 활약한 장군이 바로 정문부 장군이다.

정문부 장군은 1565년(명종20년) 한성에서 출생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원래 문신이였지만, 한성부참군이라는 무관으로 첫 관직을 맡은 후 이후 홍문관 수찬, 시간원 정언을 거쳤고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함경도의 상황은 당시 최악이였다. 본래 함경도는 건국 초기의 여러 난(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과 세종의 사군 이주 정책으로 조정의 충성심이 약한 곳이였는데, 임해군과 순화군이 근왕병(勤王兵)을 모으기는 커녕 행패를 부려 이를 도화선으로 반란이 일어나,  국경인(鞠景仁), 정말수(鄭末秀) 등이 일본군과 협조하고, 여진족까지 경원까지 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진다.


- 일대기

정문부는 300명의 의병을 모아 경성, 회령에 주둔하고 있는 국경인과 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 정말수를 해치웠으나, 후에 모은 3000의 의병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정예군 2만2천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정문부 장군은 3천의 병력으로 길주성을 포위하고, 매복 등 게릴라 전법을 활용해 2차례의 대승(석선령 전투(또는 길주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 불리운다.), 길주 전투)을 거두어 일본군 8000여명을 죽이고 일본군을 함경도에서 몰아낸다. 이 전투를 통틀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 불리운다. 또한 여진족들을 격퇴해 함경도가 여진족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 역시 막을 수 있었다.

의외로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이 승리는 행주대첩(3천 대 3만)과 같은 수적 열새를 이겨내고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대첩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문부의 대승이 잊혀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왜 잊혀졌는가?

정문부의 북관대첩은 한산도 대첩 이후의 육전 최초의 대첩이였다. 그러나 정문부는 그 이후 왜란에 참여한 흔적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선무공신에도 책봉되지 조차 않았다. 그 이유는 조정에서의 정문부의 공적을 확인하기 위한 순찰사 윤탁연이 정문부의 공을 반대로 고해 영흥부사로 승진한 것 외에는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왜란에 참여해 더 이상 공적을 올리지 못하고 북방에 계속 남아 여진족들을 방비하게 된다. 1615년에 부총관, 병조참판에 제수되지만,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벼슬을 사직한다.

하지만 광해군과 인조 대에 많은 변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듯이, 정문부 또한 예외는 아니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만, 이괄의 난 후에 그가 지은 초회왕(楚懷王)의 시가 이 난에 관련되었다 해 1624년 고문을 받고 사망하였다. 후에 함경도 주민들의 신원에 의해 신원이 회복되었지만, 당시에 한 번 죄인이라는 오명이 씌어지면 벗기 어려웠다.

더 큰 사건은 1900년대에 생긴다. 북관대첩에 관한 전적과 정문부 장군에 관한 것들을 비로 만들어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에 세워놓았는데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가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때문에 광복이 된 후에도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었다. 하지만 후에 비에 써져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 운동을 벌여 2005년 10월 20일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다가 2006년 3월 1일에 비석이 원래 있던 곳에 복원하기 위해 북한으로 전달 되고 국립중앙박물관, 독립기념관, 의정부 정문부장군묘역의 세곳에 복제비를 세웠다.


이러한 고난들을 겪으면서 정문부 장군은 단지 이름만 알려지고 있지만, 정문부 장군이 함경도에서 벌인 북관대첩 및 전투들은 왜란 가운데 최고의 대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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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설명

 

우리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영웅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처럼 국가 민족을 구원해 낸 위대한 공로자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충의공 정문부 장군처럼 엄청난 공적을 세우고도 오랜 세월동안 잊혀져있는 영웅들을 찾아 국민적 추앙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의병장 정문부의 업적에 대해 400여년 동안 너무도 알려져 있지 않음이 너무나 안타깝다. 임진왜란 10대 인물에도 들어있지 않지만 그의 공적비 북관대첩비를 보면 이순신 다음가는 공적을 세운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 북관대첩비마저 100여년동안 일본 야스꾸니 신사 한쪽에 숨겨져 있었으니 해방이후 국사학자들에게도 그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없어 국사 시간에 그 누구도 정문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최북단 함경도 지방에 있었던 사건이라 남한에서는 더욱더 그에 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던것 같다. 임진왜란에서 나라가 완전 함락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켜 7전 전승을 기록하면서 왜군의 침략을 무찌르고 나라가 다시 회복 될 수 있도록 한 이 업적은 이순신장군의 업적에 못지 않는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임란에서 삼대대첩으로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 그리고 이정암의 연안성 대첩은 한산대첩을 빼고는 모두 수성 단회전으로서 전과면에서도 의병장 정문부의 연전연승으로 가등청정의 22,000 대군을 궤멸시키어 육진 함관령 천리땅을 수복한 전과에 비길 수 없다. 이에 임란 삼대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정문부의 길주장평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하여 이순신, 권율과 같이 정문부도 국민의 추앙을 받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한 사람으로서 옳다고 확신하고 당국에 이를 강력히 요구한다” 안국승 교수  -어느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최근 보배드림을 보면서 일본의 옛날 만행이 올라와서 보는데 피가 끓는것 같아 참을수가 없네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것은 일본 불매운동 뿐이지만 최악의 상황에 있을땐 제 조상님 정문부 장군님처럼 일본과 맞서 싸우고 싶네요.

진주 이반성면 용암리에 가시면 충의사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묘소는 의정부시에 있습니다. 혹시나 휴가 때 지나가시는분들은 수고하셨다고 참배 해주시고 가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