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개인적으로 카페에 연재하는 글 일부입니다.

 

박정희는 바로 윗형 박상희를 11살 차이로 아버지처럼 존경했다..

180Cm 거구에 기품이 뛰어나 대구 경북에선 좌우를 구별않고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박정희를 대구사범 보내 교사 만든 것은 형인데 그뜻을 어기고

적극적으로 일본군이 된건 동생이다.

박상희는 중앙, 동아등에서 기자로 주요 보직을 맡다 일제말기 여운형의

조선건국연맹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광복을 옥중에서 맞는다.

일제 패망후 돌아온 동생 박정희를 부끄러움을 알라며 엄히

꾸짖으니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형과 출세지향적 친일인

동생의 갈등은 너무도 가혹했던 역사이다.

훗날 박상희 사위 김종필과 박정희의 갈등은 자랑스러운 직계와

비열한 방계의 감정 싸움일수도 있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일제시대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리는 사회주의자들 천국이었다.

독립운동가들 중 좌익의 대부분이 경상도인게 이때문이다.

해방후 미군정은 당연히 못마땅했고 강제 쌀수집과 배분으로  

식량난과 전염병이 발생한다.

대구에서 시위가 발생하고 부산 등 경상도 전역으로 번진다.

이들의 주장은 식량난 해결과 친일관리 중용의 모순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친일경찰들과 개신교 서북청년단이 투입되어

경상 도민들이 학살 당한다.

그것이 1946년 10.1 사태이다.

그때 애국지사와 반일세력은 다 죽고 경상도에는 친일과

사이비 교회만 횡행하게 되었다는 언중유골이

여기서 시작된거다.

 

보배에도 "박정희와 안두희 그리고 6.25" 란 제목으로

연재했었는데 반응이 안좋아 카페에만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