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앞서 이글은 지극히 제 개인의 일생얘기고

상당히 진부하며 이야기가 길어질것을 미리 밝히며

 

속터놓고 이야기할곳없는 그냥 그런 아재가 답답함에 털어두고싶어 쓰는글임을 알려드립니다.

 

1.그녀와의 이별

군전역후 길거리에서 운명처럼만나 4년을 사랑한 여자와 헤어졌다.

지방에 살던 나는 그녀와 함께하고싶어 대학에서 취업을 서울로 가게돼었고 그녀와 함께지냈다.

그사이 나름 잘나가던 식당을운영하던 부모님은 아버지의 도박으로 모든것을 잃었다.

그때가 그녀와 4년째였고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매몰차게 반대했다.

결국 그렇게 그녀도 잃었다.

 

그때까지도 난 늘 긍정적이었다. 

뭐든 돼겠지 그래도 난 서울에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있으니까

 

2.가족과의 이별

집안이 그리돼고나서 나는 그나마 진작에 서울로와 직장도다니고 나혼자 풀칠은 하던 때라 걱정이 없었지만

어머니와 어린동생은 그게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알아서 살겠지...

 

어머니는 숙식이 제공돼는 요양병원 요양사로 취직하셨다.

고등학생이던 동생은 외가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모르겠다.

몇개월 후 어머니는 월급을 모아 동생 자취방을 구해주었고

하필 그당시 동생의 치료받지 못한 어금니 상태가 악화돼어

500만원에 달하는 치료비가 필요해 모아둔돈과 처음으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동생에게 주었다.

그뒤론 나는 돈을 모으려고

어머니도 돈을벌어 동생을 키우려고

동생은 그저 고등학생이었기에 각자 위치에서 서로 말없이 떨어져 지냈다.

그래도 난 긍정적이었다. 나만열심히 하면 됐기에...

 

3. 직장과의 이별

군전역후 아르바이트를하는동안 그녀를 만났던것이고

복학하여 대학을다니는동안도 장거리연애를 했다.

졸업이 다가올무렵 교수님께서 서울에 취업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녀때문에 필사적으로 지원하였다.

 

복학후 나름 학교생활을 성실히 한대다 면접에서 사전에 준비를 엄청해가서인지 1명만 채용하는 회사에 다행히 내가 입사하게 돼었다.

대기업의 총판을 맡고있는 중소기업이었는데 

회사는 내 능력보다 많은 연봉을 주었고 직장내 대부분의 선배들이 잘 챙겨주었다.

 

배울점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사람을 위할줄 아는 그런회사였다.

 

입사2년차 돼어 슬슬 막내티벗고 인정받아갈쯤 대기업의 횡포로 회사는 휘청였고 

사장님의 결단은 모든것을 잃기전에 미리 정리하는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첫 직장을 잃었다.

그래도 난 긍정적이었다. 아직은 20대고 할수있는 일은 많았다.

 

4.새로운 만남

서울에 홀로살며 가족도 친구도 없던 나는 항상 회사와 집을 오갈뿐이었다.

술도 잘 못하기에 직장동료들과 술마시러 가본적도 없었다.

회식이나돼야 가는정도...

그러다 당시 타고다니던 경차 동호회에 가입을했고 쭈뼛쭈뼛 오프모임도 참석했다.

시간이흐르다보니 마음맞는 동생,형,친구들이 생겼고 심심함을 덜었다.

그렇게 활발히 활동을 하다 신입 여자회원과 친하게돼고 자연스레 연인이돼었다.

그쯤 나는 직장을 잃었다.

젊었던 나는 패기넘치게 기존하던 분야가아닌 새로운도전을 하고싶었고 어릴적부터 한번쯤 해보고싶던 광고분야로 구직을했다.

급여도 초년생때보다 훨씬 적었고 근무조건도 안좋았지만 새로운도전을 한다는 생각으로 한 회사에 취직하였다.

열심히 하면 인정받을것이고 급여도 금방오를것이라 긍정적으로 생각을했다.

 

5.프로포즈

그녀와 연애는 1년남짓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어머님께 초대를 받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하며 집안상황, 현재 나의 상황등을 일부러 솔직하게 털어놨다.

어머님은 아직 젊은데 뭘 못하겠나며 진심으로 응원해주셨다.

과거의 상처때문인지 나는 솔직히 그녀보다 그녀어머니의 그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멋지지않은 무미건조한 프로포즈였지만 그녀는 승락했다.

하지만 결혼식을할 여건은 안돼었다.

그녀와 어머님은 모두 이해했고 우리는 혼인신고라도 특별한 날에 하자며 7월7일 혼인신고를 마치고 신혼집을 준비했다.

이제 부터가 순탄한 나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6.첫번째 좌절

모아둔돈은 없었고 자취방 보증금 빼봐야 500만원이 전부였다.

수입이 적었기에 작은 월세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예산으로 구할수있는집들은 보는족족 나에게 상처가 될뿐이었고 몇주간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지고나니 모든걸 취소하고싶었다. 어딘가 도움을 받을수도 없었고 이직한지도 얼마되지않아 대출조차 어려웠다.

그때부터 시작된거같다.

그럼그렇지... 내가그렇지....

 

7.약간의 희망

장모님께서도 가진것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장모님의 친구분께서 선뜻 돈을 빌려주셨다

와이프와 내돈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빌린돈까지하여 어렵사리 반지하 전세방을 구했다.

 

비록반지하지만 넓고 깨끗했다.

집안살림이라곤 자취할때부터 쓰던 19인치 crt티비와

중고로5만원주고산 오래된 세탁기

역시 중고로 10만원주고산 오래된 냉장고가 전부였다.

 

그곳에서 첫째아이를 낳았다.

 

다들 이렇게 시작하는거지뭐....

 

8.첫번째 이사...정부의 혜택

처음살던집은 2년을 못채우고 나오게돼었다

어느날부터 비만오면 벽으로 물이스미고 윗집의 문제인지 첫정에서 물이터지고 폭우가오면 현관으로 물이들어찼다.

 

직장에있는동안 만삭의 와이프는 혼자 천정을 떼우고 물을퍼내고 닦아내는일이 비만오면 일상이었다.

다행히 집주인이 돈은먼저 빼줄테니 집을구하고 나가라고 배려해주셨다.

집을다시알아보는와중 직장동료의 조언으로 영세민전세자금대출이라는 제도를 알게돼고 자격조건이 돼어 매우 낮은이율과 장기상환조건으로 부담없이 전세금을 빌릴수있었다.

이번엔 2층 거기다 깔끔한 집으로 마음편히 이사갈수있었다.

이때부터 나도 평범해지는줄 알았다.

 

9.기쁨과 좌절

두번째 집으로 이사와서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빨리퇴근하여 와이프와 아이를보고싶었고 하루하루 커가는 첫째의 모습에 그저 평범한 삶을 이루고있는거 같았다.

 

그때쯤 와이프는 둘째를 임신했다.

나는 동생과 나이차이가 많다보니 늘 또래형제를 가진 친구들이 부럽곤했다. 그래서 우리아이도 꼭 초중고를 같이다닐수있는 적은 나이차를 가졌으면 했기에 둘째소식에 기뻣다.

첫째를 안고 둘째를 가진 와이프와 산부인과진료를 가는것조차 즐거웠다.

시간이흘러 배가 많이 불러오고 정밀초음파 진료에서 큰병원에서 다시검사를 해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소뇌쪽이 이상있는것 같다고하였다.

그때까지도 의사의 실수있거라생각했다.

노파심에 추천해준 큰병원을 갔고 초음파검사만 5시간을하였다.

소뇌벌레라 불리는부분이 보이지않는다고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봐야 정확히 알거라고한다.

그저 내가 할수있는건 아닐꺼야 아니야 라고 나자신을 속이는것뿐이었다.

 

10.현실

둘째가 태어났다.

평범한아이들과 다를바없는 외모 별다른 증상은 안보이고

그저 안도했다.

첫째때 어린이보험을 들지못했지만 왠지모를 느낌에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어린이보험에 가입했다.

 

아이가커갈수록 조금씩 달랐다

100일이 넘도록 뒤집기, 목가누기도 잘 못하였고

눈을 마주치지도못했다.

잘울지도 않았으며 첫째때와는 다르게 밤에 잘 깨지도않고 깨더라도 금새 잠들었다.

이때부터 병원을 다녔다

돌도 안된아이의 몸에 바늘을 잔득찔러대며 근전도검사를하고

독한 약으로 깊게재운뒤 mri를 찍기도했다.

검사때마다 마음아픈건 의사들도 당황할만큼 울지도않고 그저 축처저있는 둘째를 보는것이었다.

ㅈㅂㅌ증후근이라는 의심소견을 받긴했지만 확진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둘째의 재활이 시작돼었다

주변어른들은 하나같이

나는 혹은 아는 누가 늦게걷고 늦게말했다며 걱정하지말라고 위로해주었다.

나도 꼭 그럴꺼라 의심치않았다.

11.절망

한동안 둘째의 재활치료는 매주 하루씩 회사에 양해를구해 내가 데리고다녔다.

와이프혼자 아직어린 첫째를 데리고 다니긴 힘들었기때문이다.

그와중에 우리부부는 미련했다.

셋째가 생겼다.

우린 축복받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기에 그소식은 절망과 후회였다.

 

낙태를 고민하고 불법시술하는곳까지 알아볼정도였다.

하지만 생명에 할짓은 아니었고

정상적인 첫째와 셋째 사이에서 둘째가 더욱 좋아질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착각이었을까

시간이지나 둘째가 진단받은 그 정밀초음파검사때

같은진단을 받았다.

그땐 어차피 큰병원 간다한들 결과는 바뀌지않으니 태어나는 날만을 기다렸다.

 

이시기쯤 나는 끔찍한 상상까지 해가며 좌절하였지만 당시에 자주가던 커뮤니티에 이글과 비슷한 글을 쓴뒤 수많은 응원을받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12.역시

아니길 바랬지만 셋째도 같았다.

아니 조금 더 심한것같았다.

 

하지만 셋째를 위해 할수있는건없었다.

여유가없는 우리가족은 내가쉬면 안돼었다.

이때부터 와이프는 막내를안고 둘째의 재활을 다녔다.

장모님의 도움도받아가며 아이들을 케어하고 둘째는 유치원대신 병원을 다녔다.

 

와이프는 둘째 병원에서 치료법들을 어깨너머로 배워 막내를 케어했다. 딱히 그방법밖에는 없었다.

보험이 있어도 매일가야하는만큼 차비와 자기부담금조차 우리가족에겐 엄청난 부담이었기에 셋째도 재활을 다닌다는건

케어해줄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않고 순서대로 사람만들자며 우리부부는 서로를 도닥였다.

 

13.빛,빚

드디어 둘째가 걸었다.

7살이돼던해였다. 어설프지만 걷기시작했고 말은 여전히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빛을 보았다.

회사에서 전송받은 둘째가 혼자걷는영상을보고 모든직원들앞에서 미친듯이 울었고

집으로 돌아와 실제로보고 또한번 미친듯이 울었다.

둘째가 걸어서 울고있는 나를 안아주듯 잡았을때 그간의 모든것을 보상받는거같았다.

그리고 얼마뒤부터 카드연체독촉을 받기시작했다.

그래도 아이를 걷게라도 한뒤부터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인들의 조언으로 신용회복위원회 도움을받아 잠시나마 해방돼었다.

 

14.긍정,긍정

둘째는 점점 좋아졌다.

걷는것도 일반인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히 자연스러워졌고

각종검사에서 언어만빼고는 보통의 아이 혹은 그보다 높은점수를 받았다.

8살이돼어 학교를 가야했지만 1년 미뤘다.

그해에 셋째는6살이돼었고 셋째도 걷기시작했다.

적당한 케어를 받지못한 셋째는 걷는것도 어설프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충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둘째와는 달리 늘 웃거나 우는걸로 감정표현만 할뿐 의사소통은 할수없었다.

하지만 삼형제가 늘 허물없이 잘지냈고 아픈 동생들때문에 관심을 덜받은 첫째는 간혹 시기하긴하지만 동생들과 의사소통이 우리보다 월등히 잘돼어 가끔보면 마치 통역사 역활을 해주는듯 했다.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할때 코로나가 터졌다.

입학식도 안했고 등교도 안했다.

남들에겐 불행과 같은 코로나지만 우리가족에겐 오히려 다행이었다.

마스크로 가리고 대화를 자제한덕에 둘째는 아직 별다른 차별없이 학교를 다니고있다.

물론 아직도 하교후 병원은 간다.

셋째는 여전히 적당한 케어를못받고있는채로 취학통지서가 왔다.

역시 1년미뤘다. 1년동안 둘째만큼정도라도 분발해야한다.

 

15.긍정vs부정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조정을 받은뒤

뭔가 돈을 더 벌어야한다는 생각에 와이프이름으로 사업자를 냈다.

예전거래처들을 가져와 영업을하고 회사일을하며 퇴근후나 주말에 일을했다.

그와중에 자작하는취미를들여 하다보니 구매자들이 생겨나고 소소하게 부업까지 하였다.

빚보다 버는돈이 많아질무렵 

사업자로진행하던 처음으로 수천만원에 달하는 수주를 받고 

마치 내건물인양 매일가서 일을하고 내능력밖의 일은 과거 직장선배의도움을받아 진행했다.

일이 끝날무렵 그 도움주던 선배는 연락두절돼었고 내가 받았어야할 결제금 일부를 선지급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돼었다.

공들여 한 일이 이윤은커녕 빚만 남게돼었다.

이맘때 부업하던일도 전파법개정으로 개인은 제작판매할수없게돼어 그만두게돼었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했는데 부정이 조금씩 커졌다.

다시한번 이직후 늘어난수입보다 늘어나는 빚의속도가 커졌고

결국 사업자명의인 와이프 카드와 통장이 압류돼었다.

 

들어보지도못한 캐피탈과 저축은행에 내이름으로 최대한 끌어모아 와이프것을 막았지만 

그러고나니 남은건 아직 남은 와이프빚과 새로생긴 내빚이다.

모두 나의 과오라생각하는것이 긍정이라면

왜 나한테만 이런일이 생기는거냐 반문하게 만드는것이 부정인것같다. 

지금은 부정이 이기고있다.

 

 

 

 

요즘 저는 또다시 끔찍한 상상을 하곤합니다.

 

그때마다 과거에 썻던 다른커뮤글의 덧글들을보며 의지를 되새김하고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구구절절 얘기를하고싶고 그냥 누군가 들어만 줬으면 하는 마음이 크지만 

경험상 나의 속내를 털어놓으면 내 마음의 짐은 덜지언정 들어주는분께 짊어지게하는거같아 하지못하고 살았습니다.

 

이곳은 익명성이 있으니 그저 들어만주시고 욕을하셔도, 응원을해주셔도, 지혜를 알려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시금 힘낼수있는 새로운 원천이 될것같습니다.

 

지루하고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