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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7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청년 입니다.
고3올라가기 직전 아침에 출근을 위해 샤워하시던 중 아버지께선 뇌출혈로 인하여 유언 한마디 남기시지 않은체 머리 뼈가 너무 부어 머리도 닫지 않은체 세상과 등을 지셨습니다.
절대 자랑이 아니라 할아버지께선 한때 자그마한 시에 부시장으로 2번 역임하셨었고 아버지는 건설업과 증권회사에 재직하시면서 집이 조금은 부유하였습니다. 저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운동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아버지 돌아가시는 날 조차 야간 자율학습을 거짓말로 빼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울먹이며 전화로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거 같으니 얼른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였습니다.
심지어 아침에 쓰러지셔 수술 받으셨다 하시길래 왜 이제서야 연락하냐고 화를 내니 너 공부하는 시간이잖아...수술 끝나고 연락한거야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고 눈물이 앞을 가린채 택시를 타고 병원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은 참담하였으며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이 손에 힘하나 없이 누워 계셨습니다.
그날...새벽 그렇게 아버진 가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탈진하시어 쓰러지셨습니다. 마음을 추스리고 영안실로 내려가 의사선생님께
정중히 부탁드리고 몇분만 둘만의 시간을 달라고 말하니 허락을 해주셨고.. 닫기지 않은채 심으로만 고정된 아버지 머리를 더듬으며 귀에 속삭이며 다짐 했습니다.
제가 우는 날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것이며
아무런 말없이 갔다고 미안해 하지 마세요..
근 20년간 부족함 없이 키워 주시느라 고생 하셨고
남은 제 인생의 첫째도 가족 부양 둘째도 가족 부양
하며 늘 저보단 어머니와 동생을 위한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 하였습니다.
7일간의 장례식을 마친후 할아버지 댁에서 점심을 먹는데 고모두분이서 시내 건물들 관리할 사람도 이제없는데 처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한달뒤 시세의 70퍼센트만 받고 처분 하였습니다
그날밤 8남매들이 모여 할아버지께서 나누어 주시는데 저희에겐
1000만원 한장 주시더군요.. 아버지도 안계시고 저흰 아직 미성년자인데 막내집안이라는 이유로 너무 하신거 아니냐고 따지니 고모께서는 막내니까 순차적으로 내려가다보니 금액이 작다는 이유와 함께
요즘 안힘든 사람이 어디있냐고 각자 팔자대로 사는거지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돈 앞엔 피도 눈물도 없거니와 본인들 힘들때 우리 아버지가 서류없이 큰돈을 몇차례나 빌려주어 도와 주었는데 은혜조차 없다는 것을요.
그자리에서 수표 라이타에 불 태우며 울면서 말했습니다.
20년... 아니 10년만이라도 제발 아프지말고 죽지말고 기다리라고
당신들이 내친 막내 집안 아들이 어떻게 성공해서 살아가는지 보여줄테니 하고 연락을 끊은체 살게되었습니다.
그날밤 혼자 소주 한병들고 납골당 입구에서 마시고 집으로 오는길에 강 다리를 건너는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더라구요...
정말 한순간에 다리난간에서 뛰어 내렷고 눈뜨니 11일이 지나 있었으며 어머닌 우시면서 너까지 가면 어찌 살란말이냐 하셨습니다.
너무 후회스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퇴원 후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대학에 가고 싶다 하니 운동부 성적으론 무리라 하시어 독기품고 중학교 책부터 공부하며 신문 배달과 치킨 배달을 병행하여 생활비와 성적을 챙긴지 10개월 지나니 4년제 지방 대학 다닐 정도의 내신이 되어 어머니 고향인 대구에 있는 모 대학에 진학 하였습니다.
진학 후에도 어머니 허리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에 공부 보단 아르바이트가 우선이였으며 뭐든 하나라도 더 벌고 배워야 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성실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1학년을 마친 후 군면제가 확정되어 호주 워킹을 가기로 마음먹고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영어와 여행은 포기하고 대구로 어머니 모셔와야 하니 목돈에만 집중하자 다짐하였습니다
도착 후 술집 청소 오피스 청소 학교청소도 해보고 타일 관련 일도 하고 농장에서도 근무하며 11개월 동안 하루 한끼 먹으며 독하리 만큼 하루도 빠짐없이 14시간 이상을 일하니 자그마한 오래된집으로 어머니를 모실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국해서도 동생 학비와 집 생활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졸업하는 날까지 저는 일을 하며 보내었습니다.
10년 정확히는 9년차가 되었는데 할아버지 댁에서 울며 외쳤던 다짐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걸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갈 바라는게 아니라 현 시점에서 한단계만 딱 한단계만 올라가고싶은데 이 한 계단이 몇백 몇천만원짜리 스펙이 필요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언제 결혼을 하고 집과 차를 가지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지...10년 20년 뒤에도 성실성과 끈기 하나만으로 올라 갈수 있는 계단이 있을까.... 내가 하고싶었던건 뭐였으며 내가 하고싶은건 뭐지...라는 생각에 답답합니다. 이렇게라도 쓰면 조금 풀릴까해서 써봤습니다.

이 글을 왜 쓰는지도 모르겠으며 평소 눈팅만 하다가 끄적여 보았습니다. 중간중간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쓰려니 한도 끝도 없네요
긴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일교차 큰 요즘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