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기어 한국판에 실려있는 시승기를 올립니다.

문제시 삭제합니다.

 

 

 

 

-------BMW M5, Adapted from Faust---------

 

 

 

미친 말처럼 날뛰던 차가 어느 틈엔가 냉정을 되찾고 운전자의 끓어오른 감정까지 가라앉히려 한다.

 

농락 당했다는 흥분을 삭이고 대신 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507마력의 V10 엔진? 8천400rpm까지 단숨에 내닫는 광적인 회전? 지금 내게는 육체적 쾌락을 위해 영혼을 앗아가겠다는 메피스토펠리스 같은 존재일 따름이다.

 

 

 

이 원고는 BMW M5를 타고 두 달이나 지난 시점에 정리하고 있다.

이제는 M5라는 차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사운드는 얼마나 괴팍했는지, V10 엔진의 정확한 배기량조차 기억 나지 않는다.

어쩌면 기억이 희미해진 게 오히려 다행일는지 모른다. M5를 시승하는 동안에는 때려도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 상대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한, 막막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지워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을, 이미 깨끗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울 강남 거리에서 현대 쏘나타 만큼이나 자주 마주치는 차가 바로 BMW의 중형 세단이다.

배기량, 차 값과 상관없이 5시리즈를 볼 때마다 머리 속에서는 M5에 대한 기억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고 조각조각 모인 기억의 파편은 기어이 나를 조롱하던 그 악마 같은 차로 완성되어 간다.

 

 

 

M5는 분명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아무리 꺼내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살살거리며 좀더 거칠게 덤벼볼 것을 주문했다.

 

"네 영혼을 내게 팔면 육체적 쾌락을 안겨주마." 나는 파우스트가 되고 M5는 메피스토펠리스가 된다.

 

전자식 댐핑 컨트롤(EDC)과 최신 SMG 드라이브 로직의 옹호 아래 오른발을 통해 영혼이 흡수되는 것도 모르는 채 507마력을 내는 V10 엔진의 마성(魔性)을 향해 다가간다.

나의 영혼을 빨아들인 M5는 시속 100km도, 200km도, 심지어는 시속 250km까지도 껄껄 여유 있게 웃으며 달려갔다.

도로 위의 모든 생명체와 무 생명체까지 송두리째 파괴할 듯한 힘으로. 직선의 도로를 달려도, 성급하게 휘어 있는 커브로 밀어 넣어도 M5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SMG 드라이브 로직이 V10의 출력을 400마력으로 억제해 두었어도, 나는 그 힘의 절반도 채 소화해내지 못했다. 결국 내 체력과 의지까지 완전히 앗아갔고 영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틀 동안 모두 500km도 달리지 못했는데 70ℓ 용량의 연료탱크를 깡그리 비우고도 그 절반 분량의 프리미엄 휘발유를 거듭 집어삼켰다.

두 달이 지났으니 이번 달 말이면 M5와 맺은 거래의 대가가 신용카드 영수증에 찍혀 날아올 것이다. 고작 두 번의 주유 기록. 영혼을 매매한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 아닌가.

 

어둠 속에서 나를 매섭게 쏘아보는 눈. 꿈에서 깨어났지만 냉기가 어린 시퍼런 눈매가 아직도 어른거린다.

M5와의 만남이 악연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악연이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떨쳐내야 한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이어지는 시승의 기회에 평소보다 몰입의 정도가 더하다.

 

잊고 싶다, 끊고 싶다. 잊어야 한다, 끊어야 한다. 잊을 수 있을까, 끊을 수 있을까.

잊혀지지 않는다,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다.

 

포토그래퍼의 컴퓨터를 뒤져 사진기에 담아두었던 M5의 흔적을 확인한다.

M5는 황금색 야산 앞을 가로지른다. 그 안의 나는 꼿꼿했던 등을 수그린 채 곧 들이닥칠 코너로 마치 쏟아질 것처럼 몰입하고 또 몰입하고 있다. 시속 100km 정도나 됐을까? 아니, 못해도 시속 140km는 가까웠을 게다. 그래, 1km도 되지 않는 직선 도로를 끝에서 끝까지 내달리다 시속 160km 정도까지 치솟은 속도를 움켜잡고 코너를 거쳐 오르막길로 튕겨 올라가려는 참이다.

난 두려웠고, 포토그래퍼는 좀더 격정적으로 운전하길 요구했다.

 

 

 

충분히 격정적이고자 스티어링 휠에 달린 M 버튼을 누른다.

SMG 드라이브 로직의 P500 스포츠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F1 머신에서 기술적 토대를 빌려온 V10 5.0ℓ 엔진은 비로소 507마력의 힘을 송두리째 끌어올린다.

SMG 7단 반자동 기어는 수동 변속 모드로 돌입하고 가장 긴박한 속도로 기어를 바꿔 단다. 전자식 댐퍼는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액티브 시트 등받이는 스티어링 휠의 움직임에 한층 빠르고 강력하게 반응하며 옆구리를 다그칠 것이다.

 

동그마한 기어 레버를 위로 밀어 올린 채로 브레이크 페달과 액셀러레이터를 함께 밟는다.

타코미터 바늘이 4천rpm에서 숨을 헐떡이고 285/55 ZR19 사이즈의 컨티넨탈 스포트컨택2 타이어에는 힘이 그득그득 쌓여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브레이크를 풀지 말았어야 했다.

차의 앞 머리가 뒷다리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그래도 깊숙이 뻗은 오른발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507마력이다! 0→시속 100km 가속시간 4.7초다!

다시 한 번 M5의 유혹에 빠져든 셈이다. 코너를 돌아나가는 내내 척추가 비틀리는 고통을 겪는다. 긴장을 풀면 언제라도 트렁크를 코너 바깥쪽으로 던져 넣을 기세다.

그러나 그건 내 의지가 아니다. 나는 긴장을 풀 수도, 설령 긴장을 푼다 한들 도로 밖 수풀로 나동그라질 정도로 M5를 몰아 세울 용기도 없다.

 

M5는 약하디 약한 인간을 능멸한다. 운전자에게 모든 걸 맡기는 척 하더니 결국엔 스스로가 모든 걸 알아서 해낸다.

 

 

 

또 다른 사진 속의 나는 굳은 표정으로 오른쪽을 바라보며 M5의 두툼한 스티어링 휠을 다루고 있다.

팔꿈치 아래의 사이드 서포터가 옆구리를 파고들며 등받이의 너비를 좁힌다. 상체는 등받이에 푹 파묻히다 못해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려 있다.

실내를 가로지르는 센터 터널 앞쪽에는 손목만 내리면 닿을 법한 거리에 7단 SMG Ⅲ 기어박스의 시프트 레버가 있지만 내 손은 좀처럼 운전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기어를 변속하는 시프트 패들이 스티어링 휠 뒤통수에 달려 있고 인스트루먼트 패널 너머의 앞 유리창에는 헤드 업 디스플레이 장치가 쏘아주는 주행 정보가 비춰진다. 속도를 보기 위해, 엔진회전수를 확인하려고 눈을 내려 까는 일이 적어지고 오직 앞만 보며 달려간다. 기어박스 주변의 장치들을 다루는 일은 적어지고 앞을 쏘아보는 시간만 쌓여 간다.

 

나는 완벽하게 프로그래밍 된 가상 세계 속에서 프로 레이서가 된 듯한 대리만족을 느낀다.

 

꿈 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던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인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꾼 장자인가. 나는 M5를 운전했던 것인가, M5를 운전하는 가상의 나를 운전했던 것인가.

M5와의 악연은, 악연이 아닌 운명 혹은 또 다른 세상의 나를 만난 것인지 모른다.

 

 

 

휴대폰을 바꾸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DMB도 필요 없다. MP3를 재생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130만 화소대라는 카메라를 일 년 동안 쓰는 횟수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전화만 잘 걸리고 문자 메시지가 문제 없이 오고 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볍고 슬림할뿐 아니라 디자인도 심플한 제품을 찾는다.

 

하지만 유리 가판대에 즐비한 휴대폰 중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기능만 단출하게 갖춘, 슬림하고 스타일리시한 제품은 없다.

 

 

 

M5는 모든 운전 조건을 내게 맞춰 꾸릴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다.

 

댐핑 강도를 안락하거나 스포티하게 혹은 평범한 것으로 고를 수 있고 엔진 출력은 400마력이거나 507마력 모두인 것으로 선택이 가능하다.

SMG Ⅲ의 자동 변속(D) 모드는 변속 패턴을 다섯 가지로 조절하고 수동 변속(S) 상태일 때는 주행안정장치(DSC)를 껐을 때까지를 가정해 6종류의 변속 패턴이 있다.

액티브 백레스트(ABWA)의 개입 강도 역시 컴포트와 노멀, 스포트의 세 가지 분류. 심지어는 문을 잠그고 현관 문에 들어설 때까지 내 등 뒤를 비춰주는 커밍 홈 라이트 시간은 0초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초 단위로 설정이 가능하다. 무한대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차 안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아직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M5와의 이틀이 악몽 같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M5의 디자인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 알루미늄 보닛을 열어보자. 프런트 범퍼의 대형 인테이크를 통해 빨아들인 공기는 역시 두 개의 대형 에어 박스를 거쳐 굵은 인테이크 파이프를 거쳐 V10 심장으로 공급된다.

10개의 실린더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 붙인 5.0ℓ 엔진 위에는 심장의 좌심방과 우심실을 떠올리는 보기에도 힘찬 커버가 올라가 있다.

그 주위를 동맥과 정맥처럼 감싸고 있는 갖가지의 코일과 호스들. 생명에 탐닉한 M5의 디자인은 19인치의 멀티 스포크 경합금 휠에서도 발견된다.

근섬유 조직처럼 림과 중심 사이를 팽팽하게 지탱하고 있는, 힘차고 육감적인 휠 디자인. 직설적이면서도 탐미적인 M5의 디자인에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M5와의 여행은 즐거웠다.

안락하고 편안했다.

 

골프 GTI가 두어 대쯤 담겨 있는 듯한 감각. 안락함은 엔진과 트랜스미션, 하체와 섀시가 잘 짜여져 있을 때라야 비로소 완성된다.

GTI 두 대분의 성능에 이마 위 핏대가 솟을 지경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GTI 이상의 안빈낙도에 빠져드는 게 바로 M5다. 퍼포먼스는 차치하더라도 이 차는 천상 럭셔리 세단이다.

실내에는 손 닿을 곳이면 어디든 천연 가죽이 입혀져 있고 알칸타라 패브릭을 덮은 루프라이닝도 멋이 넘친다.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했다. 그러나 미치지 못하느니 주체할 수 없이 넘쳐 나는 것이 낫다는 것이 M5의 주장이다.

 

전설의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고 했던가?

 

괴테의 희곡 속 파우스트는, 그러나 파멸의 낭떠러지에서 신의 구원을 받았고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는 그의 영혼을 거두어가는 데 실패했다.

 

M5에게 팔린 줄만 알았던 내 영혼도 어느새 제 자리를 찾아왔다. 그건, 200km 남짓을 달려온 M5의 주행 가능 거리가 앞으로 75km도 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시속 90km로 새카만 어둠 속의 고속도로를 정속 주행하던 순간에 이미 깨달았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