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함대와 전투를 벌이다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호의 깃발이 인천시의 2년간의 임대로 지난 11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최신 함정 바랴크함에 도착, 깃발 대여행사가 열리고 있다

 

 

러일전쟁 전후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일본이 한반도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한 형편이다.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아리랑'에는 러일전쟁을 보는 우리 민초들의 시각이 담겼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초기에는 러시아가 이기기를 바랐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일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러시아 군대의 작태가 마을사람들을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병사들은 마을사람들을 윽박지르고 처녀들을 폭행했으며 소를 빼앗아 갔다. 반면에 일본군은 현명하게도 주민과의 대립을 피했고 물자를 조달할 때도 언제나 대가를를 지불했다'. 평북 용천 출생인 김산이 어머니에게서 들었다는 이 얘기는 러시아가 우리 민족을 직접 침략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 바랴크 깃발, 러시아 것인가= 러시아는 당시 아시아인들을 '황인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미개인으로만 봤다는 얘기다. 러일전쟁에서 충격의 패배를 당하고, 그 전리품을 '황인종'에게 넘길 수 없었다. '아리랑'에 나오듯 우리 양민들은 먼저 침략한 일제에 대한 거부감만이 있다가, 러시아의 직접 침략에 대해서 피부로 느낀 뒤로 특히 러시아의 만행을 경험
하면서 러시아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우리 양민들은 정보가 없다보니, 처음에는 외국인들이 왜 우리나라에 왔는지를 알지 못했다는 얘기다.

인천의 입장에서 러시아 바랴크호 깃발을 본다면, 조선을 삼키려다가 일본에 패해 인천 앞바다에 빠뜨리고, 목숨만 건져 도망간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러시아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기습'과 '자폭', 잘못 알려진 것들=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군함 2척이 6배나 많은 일본의 함대와 싸우다가 자폭했다고 알고 있다. 특히 러시아 해군은 일본의 기습공격을 받았다고 돼있는 자료가 많다. 또 러시아의 해군 장병들이 군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다.

이 3가지는 모두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덩치가 큰 바랴크호는 폭파시킬 경우 옮겨타고 가야
할 프랑스 등 유럽 군함 등이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폭을 하지 않고 그대로 수장시켰다. 나머지 포함 카레예츠호와 상선 숭가리호는 폭파시켰다. 그 잔해가 지금의 중구청 일대까지 날렸다고 한다. '기습'이란 표현도 적절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전쟁 당일 내항에 있다가 일전을 각오하고 팔미도쪽으로 나갔고, 거기서 교전을 했기 때문이다. 또 교전중에 숨을 거둔 40여명은 그대로 배와 함께 수장됐으나, 나머지는 모두 다른 외국 함정으로 옮겨졌다. 두 배의 함장들은 모두 귀국해 러시아의 영웅이 됐다.

■ 러일전쟁에 왜 인천의 시각은 없나=1904년 2월 9일, 106년 전 인천 사람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러시아와 일본의 군함이 전투하는 장면을 지켜만 봤다. 왜 러일전쟁이 인천에서 발발했는지, 그 인천의 피해는 어땠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정리된 게 많지 않다.

이 '제물포해전'이라고 이름붙은 러일전쟁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라는 '양무호'도 동원됐다고 한다. 일본의 앞잡이 역할
을 했고, 일부는 그 대가를 챙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군함의 피해도 막대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를 정확히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인천시의 이번 바랴크호 깃발 임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희환 인하대 연구교수는 "러일전쟁에 대한 역사적
성찰없이 바랴크호의 깃발을 러시아쪽에 임대한 것은 문제가 있다"며 "지역에서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공론화 과정없이 러시아쪽과 송영길 인천시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만을 생각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우성 인천시 시사편찬위원은 "러일전쟁의 목표는 조선반도의 병합이라고 일본인들은 말한다. 조선반도를 누가 먹겠냐고 서로 싸운 장소가 인천이었다"면서 "일본은 '언덕 위의 구름'(드라마) 만들면서 아직도 승전을 찬양하고 있고, 러시아는 깃발달라고 하고 있다. 바랴크호 깃발을 통해 러시아 내셔널리즘이 부활했다. 거기에 우리가 뽕짝을 맞춘 것이다"라고 했다.

■ 제물포해전 일지

▲ 1904년 2월 7일 -주한 러시아 공사 일본군 대규모
마산포에 상륙 정보 입수

-러시아 우편선(상선) 숭가리호 제물포 입항, 9일께 전쟁 예상첩보 바랴크호 함장에 알림

▲ 2월 8일-카레예츠호, 한반도 정세 중국 뤼순의 극동
사령관에게 알리고 행동 지침 받아 오라는 명령
내림.

-카레예츠호, 인천 앞바다 외해를 나서자 마자 일본군 함대에 발각(오후 4시 35분)

-일본 군함 3발의 어뢰 카레예츠호에 발사. 모두 빗나감

-카레예츠호 제물포항 피항, 러시아 함대 전시 태세 돌입

▲ 2월 9일-오전 10시, 일본 측 러시아 함대 정오까지 제물포항 이동 요구

-오전 11시 15분, 바랴크호, 카레예츠호 전투 위해 팔미도 인근으로 이동

-낮 12시 39분, 전투 개시

-오후 1시, 바랴크호, 카레예츠호 제물포항으로 귀항

-오후 6시, 바랴크호 수장, 카레예츠호 자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