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97년(영양왕 8년) 수문제(隋文帝)가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사신과 국서를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국서내용이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는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 있었다. 평원왕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태자인 영양왕이 등극하자마자 중신회의를 열고 회신할 내용을 의논할 때 군신간의 의견이 여러 갈래였으나 강장군이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함에 영양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있는 만리장성의 입구인 임유관(臨楡關)으로 출전하여 첨예병 1만명으로 요서(遼西)를 공격하여 수군(隋軍)을 유인하며, 거란병 수천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했으며, 이듬해 다시 대병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징벌하고 수나라 요서 총관 장충(張忠)과 접전, 임유관으로 거짓퇴병(退兵)하자 수문제는 30만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을 나가게 하고 주라후(周羅候)로 하여금 평양(平壤)으로 진격하는 척하였으나 강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임을 미리 알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나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군(隋軍)은 군량미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강화를 맺고 상품교역을 재개하였으나, 10수년이 지난 뒤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 (영양왕 23) 고구려를 침공하자, 강장군이 수륙양군병마도원수(水陸兩軍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의 동생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한편 수양제(隋煬帝)는 평양을 단숨에 공격하기 위하여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강장군은 을지문덕 장군을 시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유인시키자, 적은 속은 것을 알고 후퇴하다가 살수(지금의 청청강)에서 대패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천 백여명에 불과했다. 이 싸움을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 하며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진주강씨–강이식 장군에 대한 글 인용.. =>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 천천강.. ----------------------------------------------------------------------------- "삼국사기에서 김부식도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했다"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이 이루어진 곳.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북한 평양방송은 21일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612년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의 `살수(薩水)'는 중국 요동반도 대양하(大洋河)의 큰 지류인 초자하(哨子河)라고 주장했다. 방송은 "수나라 군대는 압록수 즉 중국의 태자하(太子河, 비류수)를 건너 침공해 왔다"며 "을지문덕 장군의 유인작전에 의해 살수 서쪽까지 끌려온 수나라 군사들은 장마철에 물이 불어난 살수 즉 오늘 중국에 있는 대양하의 큰 지류인 초자하 기슭에서 몰살했다"고 전했다. 방송은 "지난 시기 살수대첩을 오늘의 우리나라 청천강에서 있었던 대승리로 간주하여 왔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우리측 기록은 버리고 자치통감, 수서 등의 다른 나라 기록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방송은 살수가 청천강이 될 수 없는 근거로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비롯한 요하 동쪽의 기본 전선에서 완강한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고 기본전선의 한 모퉁이도 돌파하지 않았던 정황에서 비행기나 탱크와 같은 현대적 군사기술 기재도 없던 당시에 고구려 후방 깊이 천수백리나 되는 수도 평양성까지 30여만의 군대를 별동대로 들이민다는 것은 군사학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가지로는 요동성에 자리잡고 있던 수양제가 7월 24일의 패전 소식을 들은지 하루만인 7월 25일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청천강일 경우 그 거리가 1천리가 넘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 방송은 "말을 타고 달려도 하루 동안에 왕복 2천여리를 도저히 달릴 수 없다"며 "수양제가 그 다음 날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압록수를 건넌 적군이 한 200여리 더 가서 25일 안으로 당도할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요동성과 살수 사이의 거리는 몇백리 안팎이었으며 따라서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중국의 초자하라는 것이다. 북한 역사학자들은 수나라가 쳐들어온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단둥(丹東) 위에 있는 봉황성이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압록강 이북을 통치하기 위해 봉황성에 북평양을 설치하였는데 수나라가 쳐들어온 것은 바로 북평양이고, 수나라 군이 도망가다 만나는 첫번째 강은 초자하라고 일관되게 논리를 펴고 있다. 청천강 설은 "평양까지 쳐들어왔던 수나라 군사가 도망가다 처음 만나는 큰 강에서 을지문덕 장군한테 몰살한다"는 역사 기록을 근거로, 수나라의 침공을 받은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살수는 청천강이라는 해석에서 나왔다. 국내 일부 학자들은 살수를 중국 허베이(河北)성 칭하이(滄海) 서쪽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ghwang@yna.co.kr (고구려본기 영유왕 14년) 이미 여러차례 언급한 고구려 천리장성에 대한 기록이다. 왕은 뭇사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의 부여성(扶餘城)에서 동남(東南)의 해유리까지 1천 여리를 잇대니 무려 16년만에 역사를 끝냈다. 三國史記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有里 舊唐書199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有里 唐 書220 東北首領域 西南屬海久 삼국사기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유리 구당서199 동북자부여성 서남지해유리 당 서220 동북수령역 서남속해구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는지 9년 후의 기록이다. 이 장성의 기록에서 장성의 서쪽에 고구려가 있고 동쪽은 신라땅인데 어떻게 남의 땅에 살수(薩水)가 있었겠는가 ?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 천리장성을 기준으로 서쪽이 고구려, 동쪽이 신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근거로 천리장성의 서쪽으로 현재 철도와 산맥이 있다. 즉 방어위치가 동쪽이라는 얘기다. 더욱이 살수대첩 이후 23년이 지난 뒤의 당과 고구려의 전쟁에서 빼앗긴 지명이 장성 서쪽에 있는데 - 은산 - 신성 - 용도 - 고대인성 (銀山, 新城, 用道, 古大人城)의 기록이 그것이다. 이 지명은 북평(北平)의 서쪽에 있는 지명들이니 위 지명이 있는 지역에 살수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장성의 기록과 고구려 패망때의 지명인 - 은산, - 고대인성, - 신성, - 용도 등이 실존하므로 (고구려와 한, 당과의 전쟁지명이 모두 중국 태행산맥의 동쪽에 실존한다.) 고구려 평양은 유,연,제,노와 오,월 지역 요 동쪽과 "요사"에 의하여 해주 사이에서 찾아야 하며 살수 역시 이 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구려 천리장성과 고려 천리장성) 위의 지도는 중국의 정,사서들을 종합해서 고구려 천리장성과 고려의 천리장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 주황색 : 고려 천리장성 - 노란색 : 고구려 천리장성 - 초록색 : 만리장성 - 보라색 : 진장성 - - 출처-http://tong.nate.com/Ronald -------------------------------------------------------------------------- 살수대첩에 대한 의문과 추론 ... 2006.01.05 11:50 http://tong.nate.com/o18201/10238885 살수대첩에 대한 의문과 추론 ... 미국의 역사학자였던, 룩 콴텐이 지은「유목민족제국사」를 볼 것 같으면, 수나라는 건국초기부터 돌궐족의 압박에 시달립니다. 당시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되어, 황하 이북의 광대한 초원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엄청난 힘으로 중원대륙을 내리누르고 있었습니다. 돌궐의 침입은 새로 건설된 수조(隋朝)에 큰 위협이 되었다…양견(楊堅)은 돌궐과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63쪽) 그런데 수양제는 동쪽 변방에 있는 고구려와 국운을 건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고구려로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거대한 호랑이가 문전을 위협하고 있는데 내버려두고 산너머에 있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잡혀 죽었다는 격입니다. 당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19년 돌궐은 침략을 감행하여 당(唐)의 수도를 위협하였다(長安이 아닌 太原)…620년부터 630년까지 당조(唐朝)에 불리한 상황이 계속되어 국가의 존립마저 위협을 받았다…(66쪽) 이에 626년 등극한 당태종 이세민은 돌궐에 대한 유화정책과 한편으로는 돌궐 내부의 반란을 이용하여 돌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그런 형편에 당태종 역시 국운을 걸고 돌궐의 땅을 지나 고구려에 대한 정벌을 감행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과연 청천강일 수 있을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수나라는 국가의 존립마저 위협하는 돌궐을 내버려두고 요동을 지나 한반도까지 대군을 이끌고 올 수 있었을까요. 당나라 역시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의혹이 들게 합니다. 25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역사서를 남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역사서를 남겼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중원대륙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소위 중국왕조로 아무런 의문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돌궐은 그 방대한 지역을 엄청난 힘으로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국명(國名)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동돌궐, 서돌궐이란 부족명으로 불려질 따름입니다. 그리고 한문으로 쓰여진 자체 역사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돌궐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는 자체의 역사기술을 하지 못했고, 다른 왕조의 역사서에 의존해 우리의 역사를 이해했으므로, 변두리 역사로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룩 콴텐의 지적대로, 중원의 역사는 극심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사란 언제나 국가존재의 우위에 대한 기술입니다. 제 나라를 비하시키는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목민족제국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궁금했던 것은, 과연 신라와 고구려와 돌궐과의 관계는 어떠했느냐는 것입니다. 신라초기의 왕의 호칭과 같은 돌궐 왕의 호칭인 간(干). 동돌궐은 당나라와 서돌궐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에 역시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돌궐은 당나라와 다시 4년동안 11차의 전쟁을 치르고 승리하여 제2돌궐제국시대를 열게 됩니다.(우리의 역사에서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던 비슷한 시기). 제가 추론해보건대, 돌궐은 분명 고구려와 관련이 있고, 살수대첩은 지금은 정확히 어디라고 고증을 할 수 없지만, 황하 유역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에는 돌궐의 막강한 힘으로 인해 당시 황하 이북으로 진출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 '을지'의 유래 ‘을지’라는 성에 대하여 고구려 관위명(官位名)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가부장(家父長)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을’만이 성이요 ‘지’는 존대의 접미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인 ‘울지(尉遲)’씨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을 선비족계통의 귀화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 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