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바로 읽기 2 >(김운회)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 33 삼국지와 고구려(상), 알타이를 찾아서 몽골과 고구려의 건국신화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지금까지 쥬신족에 대한 태도는 쇼비니즘적인 과격한 태도나, 중화주의 사고방식에 젖은 보수적 태도 뿐이었다. 몽골.만주.한반도.일본에 이르는 민족이 동일 계열이다. 이들 전체를 '대쥬신'이라고 부르자. 중국인이 부른 오랑캐(유목민) 가운데 강족을 제외한 서융(흉노).북적(흉노,선비).동이(갈,예맥)는 모두 같은 계열이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공명성 박사는 한국의 역대 국호가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방의 해뜨는 나라','태양이 솟고 밝고 선명한 나라'라는 공통의 뜻을 담고 있다. 아사달,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일본,알타이,아사나,예맥 등등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만주족을 부르는 명칭이 시대마다 달랐다. 그러나 다른 민족이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당나라에서는 말갈, 송나라에서는 여진, 청나라 때는 만주족으로 불렸다. 만주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주민이었다. 만주족과 한민족은 뿌리가 같다. 그런데 왜 만주족을 오랑캐로 취급하고 외면했을까? 그 이유는 1)조선이 소중화주의에 빠져서, 2)고구려.발해의 지배,피지배민족을 지나치게 구분한 결과이다. 이것은 1933년 일본인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논리가 유행한 때문이다. 말갈은=고구려인인데 엉뚱한 주장을 한것이다. 발해는 결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었다. 신라가 발해을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칭한 것은 오늘날 북한,남조선 호칭과 비슷한 것이다. 대립하고는 있었지만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으로 인식한 것이다. 흉노(견융,융적, 서쪽으로 이동한 훈족),몽골,만주족(호)이 자로 잰듯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대쥬신족은 알타이 산맥과 바이칼 호에서 남으로 이동해 현재의 요서,요동,청주,시베리아,한반도 등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족과 대립을 통해 성장.발전하였다. 5세기 무렵에 동북아시아 패권국가로 성장했다. 몽골과 고구려는 형제관계였다. 몽골과 고구려는 언어.문화.습관.관습 등이 비슷하다. 곧 고구려와 몽골은 비슷한 인종적.문화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고구려인이 남하하는 과정과 농경위주의 정착생활을 하면서 차이점도 생겼다. 대쥬신족은 광대한 지역에 분포해 자유로운 유목생활을 하다보니 부족.국가로의 통합이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걸이 나타나면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한다. 모돈.단석괴.광개토대왕,야율아보기(요나라 시조).아골타(금나라 시조).칭기즈칸.누르하치 등이 그 예이다. 현재 만주족은 약 20만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03년에 동북아 민족들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인의 유전자와 9.4개의 염기가 달랐다. 몽골인과는 7.8개가 달랐다. 민족이 갈라지고 3000년이 지나야 하나의 염기가 달라진다는 이론에 따르면 몽골인이 중국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갈라지고 4000,5000년 후에 한국인과 몽골인이 갈라졌다. 일본 도쿠나가 교수의 동아시아 12민족 비교분석에 따르면 일본 본토인은 오키나와인이나 홋카이도의 아이누족보다 한국인과 더 가깝다는 결과가 나왔다. 곧 황국사관의 허구성을 증명한다. 34 삼국지와 고구려(중), 제1차 요동전쟁 민족 형성 요소에는 객관적 요소(공통된 언어.지역.혈연.문화.정치.역사), 주관적 요소(민족의식)가 있다. 예맥족(고조선,고구려 민족)은 기원전 3세기 경에 만주 중부의 송화강 유역에 출현했다. 그러나 이들은 산재한 채 일정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부족으로 살았다. 유목민은 농경민과 달리 일정한 거주지역이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본질은 '새떼처럼 모였다가 구름처럼 흩어지는 것'이다. 1577년의 만주족 총 인구는 10만이 넘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근 부족(대쥬신족 전체)을 점령하면서 40.50만에 달하게 되고, 이 인원으로 중국 정벌에 나서게되었다. 일체감을 바탕으로 해서 국가를 형성한 케이스다. 청나라는 중국 지배 이후 급속히 한족화되어서 결국 몽골.만주에서 대쥬신족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지금은 한족의 고유영역과 대쥬신의 영역(알타이동부.몽골.만주)이 모두 중국의 영역이 되었다. 현대 중국 정부는 청나라가 이룩한 영토를 물려받았지만 만주족을 천시하고 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당시에 고구려는 위나라와 협력.대결을 펼쳤다. 나관중 삼국지 106회<공손연이 양평에서 사마의에게 토벌당하다> - 요동태수 공손연이 스스로 연왕이라고 칭하자, 위나라 황제 조예는 사마의를 보냈다. 사마의는 연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공손연은 참수되었다. 삼국지에는 당시 전쟁에서 활약을 펼친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고구려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제갈량에 맞서는 사마의의 실력을 과장하기 위해서 마치 사마의 혼자서 4만 병력으로 15만의 공손연을 물리친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서기 236년 위나라 황제 조예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요동 남부에 주둔시켜 공손연 세력을 견제한다. 237년 관구검이 요수로 출병하지만 장마로 철군한다. 이에 고무된 공손연은 독립하여 연호를 소한원년으로 한다. 위나라는 사마의를 중심으로 공손연 토벌에 나선다. 238년 고구려 동천왕의 군대(기병 약 2000)가 위나라 군대와 합류한다. 연합군은 공선연의 군대를 격파하고 정벌을 마무리한다. 제1차 요동전쟁으로 고구려는 1)지역사정에 밝은 1차적인 주적을 섬멸했다. 2)위나라의 사정(군사.작전 등)을 알게 되었다. 3)공손연의 몰락으로 요동을 확보할 기회가 생겼다. 35 삼국지와 고구려(하), 밀우와 유유 공손연을 연합해 무찌른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 한동안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상충한 결과 요동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긴장이 고조된다. 242년 고구려는 요동 공략의 일환으로 서안평을 공격한다. 장군 득래는 위나라 공격 중지를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다. 위서에는 당시 군대가 1만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실제 4,5만의 대군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동천왕의 군대는 2만 정도였다. 첫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가 약 6천 정도 전사하자 동천왕은 의기양양해서 철기군 5천을 거느리고 위군을 몰아붙인다. 그러나 관구검의 계략에 빠져 1만 8천 군사를 잃고 남은 1천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피신한다. 관구검은 이에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파괴한다. 겨울이 되자 관구검은 일단 요동의 양평으로 돌아간다. 이듬해 봄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에게 진격을 명하고, 왕기는 옥저를 지나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른다. 고구려 지도부가 후퇴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결사대를 조직하는데 밀우와 유옥구가 이끌었다. 유유가 거짓 항복하여 위나라 장수를 죽이자, 위나라 군대가 혼란에 빠지고 이에 동천왕은 위군을 물리치고 환도성으로 돌아온다. 밀우와 유유를 일등공신으로 삼고 전사한 유유를 구사자(九使者)에 추증하고 아들 다우를 대사자에 임명한다. 이후 양측 모두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고구려는 강인한 숭무정신과 발달된 군사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안악 3호 고분(제2차 요동전쟁 이후 약 130여년인 375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을 보면 철갑기병.경기병.창수.환도수.부월수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활쏘기.무술 등을 연마했다. 고구려는 고대적 병영국가의 전형이다. 참고문헌 <몽골비사> 박원길(몽골학 전문가) <조선 역대국호 연구> 공명성(북한 사회과학원 역사학연구소 근대사실장) , <고구려 민족 형성과 사회> 이옥, <고구려 민족 탐원> 왕건군, <중국 민족사> 왕동련 <삼국지 위지 동이전>,<금사>,<삼국사기>,<삼국유사> 등등 위 글에도 나오지만 한국인의 역사인식이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점을 일단 지적하고 싶다. 철저한 서구중심,또는 중국중심주의 사관에 매몰되어 있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게 지금 현실이다. 한국 중심의 역사관.세계관이 아닌 중국.미국 중심의 역사관.세계관 속에 아직도 갇혀있다. 그러고 여전히 대한민국이 약소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도 문제다. 경제 규모나 교역규모로 봤을때 세계12권인 한국이 어떻게 약소국이 될 수 있는가? 다른 대부분의 영역에서도 수위에 들어있다. 환단고기나 일부 고서에 나오는 신라 영토가 지금의 중국 본토에도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할 필요는 없다. 고구려와 발해가 만주를 다스렸고, 요.금.청이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우리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을 찾을 수 있다. 금.청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바로 한민족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단군일계' 단일민족주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들 민족은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진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 역사를 우리 것으로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후금(청)이 일어나면서 몽골족과 대립을 하게되지만 1636년에 심양에서 대칸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부족장회의)가 소집되어 홍타이지를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한다. 곧 만주족과 몽골족이 회의를 통해 최고통치자를 결정하고 이를 받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조선은 청나라의 형제국 제안을 끝내 거부했나? 우리가 한국사시간에 배운 오랑캐를 물리친 역사도 그러므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서희가 강동 6주를 회담을 통해서 얻은 것이 단순히 서희가 외교력이 뛰어나서, 또는 거란족이 고려의 국력이나 군사력을 무서워해서만은 아니었다. 형제국이라는 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통해 거란족을 물리친 일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거란족이 한민족과 가깝다는 사실은 적시를 해야한다. 이것도 큰 의미의 동족상잔이었다. 병자호란도 아직까지도 청나라가 침입해서 조선이 고난을 당한 역사라고 단순히 가르쳐서는 안된다. 광해군의 정책을 성실히 수행했다면 애초에 전쟁은 없었다. 물론 조선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청나라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점 또한 너무도 당연하게 성립한다. 그리고 원나라는 조금 멀지만, 청나라는 그야말로 형제국이나 다름없는데도 소중화주의에 빠진 조선 집권세력은 쓸데없이 대립을 해서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다고 그들이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단행한 것도 아니다. 이점은 효종의 북벌론으로 구체화되지만 <허생>에 나오듯이 그야말로 쇼에 가까웠다. 실력은 개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무지 강한 꼴통이 바로 조선 사대부의 정체였다. 그들은 항상 잘난척, 배부른척, 도도한척, 인자한척만 했다. 그들은 항상 두개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