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보니 차이나 인민군이 유사시 대만을 겨냥해 50만 대군을 집결중이라는 미군 보고서가 발표되었고 이에 발끈한 차이나 공산당은 주중 미대사를 소환해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대만을 두고 벌이는 미국과 차이나간의 신경전이 예사롭지 않는 듯 하다. 어쨋든 차이나 압박을 위한 미국의 공세적 압박은 점점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경향신문에 발표된 주한미군의 기동타격대 전환 완료와 내년 1월 출범하게되는 오산 동북아 공군 사령부에 대한 기사를 분석해 보자. 글이 다소 길어질것 같은데,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론) 본래 전통적인 미국의 세계전략은 봉쇄정책이다. 이는 2차 대전이후 유럽열강의 식민지를 미소가 양분하여 점령하면서 소련 공산주의의 맹렬한 팽창을 우려하던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수립한 전략인데 아시아와 유럽에서 실재적으로 적용되었다. 유럽은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의 군사안보조약인 바르샤바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인 서유럽의 연합인 나토가 성립되었고 양대 조약의 힘이 충돌하는 지점이 분단된 독일이었고 그중에서도 베를린 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은 단순히 동독과 서독의 체제경쟁이 아닌 미소의 힘이 충돌하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 러시아대통령인 푸틴이 동독이 붕괴되었을시 동독의 첩보관리로 근무한 것으로봐도 동서독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소련이나 미국이나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인 셈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아시아 에서도 미소는 충돌하였는데 특히 대륙에서 장개석이 패퇴하고 모택동의 공산당이 통일하면서 미국의 봉쇄정책을 강화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애치스 라인이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인 애치슨의 이름을 본따 붙여진 이름인데, 구체적으로 남한. 대만. 오끼나와. 필리핀에 이르는 차이나의 동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에 미군을 주둔시킴으로 차이나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전략적 라인이고 러시아와 차이나의 공산세력과 미국의 해양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 였다. 본래 애치슨 라인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을 깃점으로 연결될 계획이 었지만 미국의 보다 공세적 봉쇄정책으로 일본은 동북아 전략 사령부를 주둔하고 대신 일본의 역활을 남한으로 한걸음 앞쪽으로 이동시키면서 한반도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본론) 유럽의 경우에는 미소간의 군사대결이 없었지만 아시아 에서는 그 양상이 달랐다. 미국의 적극적 봉쇄에 압박감을 느꼈던 소련은 미국의 봉쇄선을 무력화 하기로 하였고 북한과 연합으로 남침을 강행하였다. 개인적인 확신이지만 한국전쟁에서 이유야 어쨋든 먼저 움직인 것은 북측인 것은 명백하다, 단지 북한이 통일 열망으로 남침했다기 보다는 앞으로 예상되는 미군의 북진에 적극적 방어의 개념으로 군대를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한국전쟁은 터졌고 전쟁의 결과는 양쪽의 승패없는 무승부 였다, 더구나 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으로 체결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과 같은 상태였다. 사실 북한군이 한미 연합군에 패퇴하여 압록강 까지 밀렸을때 까지 소련이 직접 군사개입을 자체한 것은 상당히 의외이다. 전략적인 가치로 보았을때 소련은 북한을 절대 포기할 수없는 보배인 것이다.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이것은 스탈린의 두뇌 회전이 모택동 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스탈린은 미군이 차이나 국경까지 진주하면 인민해방군이 필시 참전할 것이라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미군은 압록강을 도하해서 만주로 진격할 확율이 100프로 였기 때문이다. 만일 모택동이 보다 영리하게 작전을 했다면 한반도에 개입한 군대는 중공군이 아닌 소련군대였고 중공은 힘을 비축해 대만으로 진격해서 국민당 잔당을 소멸시켰을 수도 있었다. 어쨋든 새로 성립한 휴전체제는 동북아시아에 유럽에 비하여 극단적인 냉전을 야기 시켰는데 미소의 경쟁은 양국의 힘이 충돌하는 남북에 집중되었다. 물론 북한이 남한에 비해 소련으로 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 상대적인 개념이지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닌것이다. 체제경쟁을 하던 남북은 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이 압승했으나 80년대 진입하면서 남한의 승리로 점차 기울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북한의 실수가 아니라 8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 사회주의 모국 소련의 급속한 영향력 쇠퇴에 기인한다고 볼수 있다. 세계경제와 생산력에 있어서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에 완전히 밀리기 시작했고 이것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던 북한에게 경쟁력 약화로 바로 나타났고 반대로 남한은 호황을 구가하던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남북의 경제적인 격차는 해소하기 힘든만큼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89년 동독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소련 연방체제로 함께 붕괴되면서 상황은 북한에게 더욱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북한이 체택하고 있는 사회주의식 국제경제 시스템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붕괴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고립되게 되었고 차이나는 일찍부터 미국식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이식받고 있는 상태라 충격의 테두리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북한은 완전히 자립의 길을 강요받게 되었는데 더우기 사회주의 혈맹이라던 차이나가 배신을 하면서 북한에게 국경무역의 결제수단으로 미국 달러를 요구하면서 차이나와 북한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소위 90년대 중반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은 시작되었다. 결국 북한의 고난의 행군의 주범은 본질적으로는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의 붕괴였으나 믿었던 사회주의 동맹국 차이나의 배신이라고 볼수 있다, 만일 그때 차이나가 1960년대 북한이 당시 피폐해진 차이나를 도왔던 만큼만 북한에 원조를 했어도 수십만이 굶어 죽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여담으로 격렬하게 저항한 적은 용서해도 배신한 넘은 용서할수 없는것이 남북을 떠나 한국사람의 특징이다. 고난의 행군을 하던중에 북한은 이 악몽을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을 간구하게 되고 결국 무력의 증강이라는 군사대국의 길로 들어섰다. 남한은 남한대로 이때 암에푸 라는 재앙을 만나서 경제가 파탄나며 북한의 고난의 행군에 본의아니게 동참하게 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남북은 극한 대결을 벌이다가 거의 동시에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되면서 얽혔던 상대의 저주가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막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암에푸 위기를 극본하면서 동시에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수행했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만일 이때 남한이 암에푸로 쑥대밭이 되지 않고 한창 고공행진을 하였더라면 북한이 과연 남한의 대북 사업과 정책을 쉽게 받아들였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배가 고파본 넘이 남의 힘든일을 이해할 수 있듯이 암에푸로 거지가 다된 남한이 그 와중에도 대북 지원에 힘을 다했던 것을 안 북한의 김정일은 남한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고 결국 분단 50년의 가장 큰 감동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대북사업과 화해정책은 사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용기있는 방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김정일이 김대통령의 제안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실은 남북이 다같이 고난의 행군을 걷고 있던 힘든 상태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리라, 우리가 암에푸로 쪽박 찻을때 바짓 가랭이를 붙잡고 도와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경멸스런 눈으로 보던 일본인의 오만을..... 결국 남한은 엠에푸의 위기를 금융개혁과 체질개선으로 극복하고 북한은 남한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90년대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서서히 회복하게 되었고 이와중에 북한의 핵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북한의 핵문제는 언론에서 여러 각도로 조명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애치슨 라인의 경우에서 해답을 찻고자 한다. 한국전쟁이 미국의 적극적 봉쇄정책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터진 전쟁이듯이 북한의 핵문제도 미국의 적극적 봉쇄정책에 대한 대항의 의미인 공세적 방어적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대북 봉쇄는 용납할수 없고 더더욱 봉쇄라인이 한층 북쪽으로 상승하는 것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력은 50년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북한의 실제적인 핵보유로 미국은 과거 50년동안 유지해온 전통적 봉쇄정책의 수정을 해야만 했는데 북한이 핵실험이라도 하는 날에는 봉쇄선의 딱 중심이 되는 중앙부가 돌파되기 때문이고 이 경우 미국은 한반도의 패권을 상실하면서 동시에 차이나의 봉쇄 정책에도 심각한 전략적 균열이 발생할 것이다. 결국 미국은 동북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과 협의할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체제 보장이고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봉쇄라인의 유지이다. 둘의 공통분모를 찻으며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은 일차천리로 진행될 것인데 문제는 그 공통 분모를 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통분모를 찻기 위해서는 무조건 휴전협정을 종전 협정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전협정이 되면 미군이 남한에 주둔할 명분이 소멸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이 과정에서 나온것인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 론이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미군이 차이나를 상대로 분쟁을 벌일때 중립을 선언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과 북한의 균형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합의가 불가능한 북미간의 공통분모를 남한이 책임지겠다는 의미이다. 즉 미국의 봉쇄라인을 유지하면서도 북한의 체제보장 역시 남한이 중계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북미간의 서로 신뢰가 바탕으로 해야 효과가 있는 정책이다. 국제 외교에서 같은 민족 이외에는 영원한 우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북미간의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합의가 가능하려면 구체적인 협약이 있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것을 미국의 북한 핵무기 용인으로 보고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북핵 불용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묵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정책은 미국의 전통적인 NCND 가 될 확율이 높을 것이다. (결론) 이런 결과로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던 주한미군의 동북아 기동타격대 전환완료 기사를 살펴보면 통일은 몰라도 50년동안 한반도의 멍에가 되었던 휴전협정이 종전협정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북미간의 관계 개선으로 휴전협정 자체가 사문화 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의 말대로 북한은 미국과 우방이 되길 원한다는 것이 실현되면 남한에 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대신 북한은 미국으로 부터 완전한 안전보장을 받게 되고 그것은 한민족 전체로 보면 친미적인 구도는 유지되지만 분단을 극복하고 대결을 종식시키는 기념비 적인 사건도 되는 셈이다. 그리고 밀렸던 숙제도 하나 하나 해야될 것이다, 90년대 북한을 배신한 차이나와 한반도 분단에서 단물을 취하면서 과거사를 미화하는 일본에 대해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50년동안 차이나가 불법점유하고 있는 조선의 옛영토인 만주를 돌려받아야 할때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숨돌리면 당근 대만쪽으로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오늘 보고된 미 국방부 보고서에 50만의 거대한 인민 해방군이 대만쪽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그만큼 차이나가 조급해 한다는 반증이다. (추신) 참고로 오산에 공군사령부가 온다는 것은 남한이 미국과의 동맹에서 일본의 하위 개념인 한미일 삼각동맹이 아니라 일본과는 독립된 개별된 세력으로 미국과의 동맹을 맷을 것을 의미한다, 고이즈미는 당연히 속이 쓰릴 것이다. 대륙은 분열되고 고토회복의 숙원을 풀 날이 의외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