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대 사건은 1989년 5월 학생들이 학내에 경찰관을 감금하고 이들을 구출하려는 공권력에 저항해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 져 7명을 치사케 한 사건입니다. 5ㆍ3 부산 동의대 사태 순직자 명단 경찰관 ▲최동문 경위(경북 금릉) ▲박병환 경사(경남 충무) ▲정영환 경사(경북 경산) ▲조덕래 경사(경남 함안) 전ㆍ의경 ▲모성태 수경(전남 무안) ▲김명화 수경(전남 함평) ▲서원석 수경(경남 김해)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살인자는 없는데 살해를 당한 사람들은 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저 젊은 피들을 누가 어떻게 보상할것인가?역사는 왜 이 사건을 숨기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그때 당시 학생들은 지금 웃으며 길거리를 활보하지만 그당시 숨진 진압대원들의 원혼은 아직도 동의대를 감싸고 있고, 길거리를 울면서 원통해서 돌아다닐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들. 경찰관 7인이 스러져 간 자리에… 지난 5월 3일 11시, 국립대전현충원 경찰묘역에서 ‘5ㆍ3 동의대 사태 순국경찰관 13주기 추도식’이 있었다. 아침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도 결국 시간대에 맞춰 보슬비를 뿌리며 참석한 120여 명의 유족과 동료경찰관, 경우회원들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특히 지난 4월 27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가 제41차 본회의에서 경찰관 7명이 불에 타 숨진 1989년 부산 동의대 사태 관련자 48명에 대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이후라 참석자들의 분위기는 더욱 침통하고 무거웠다. 유족과 동료경찰관들 너무 억울해 부산지방경찰청(청장 박일만 치안감) 영도경찰서 김완철 경위(당시 소대장)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순국선열 및 순국경찰관에 대한 묵념’으로 13주기 추도식이 시작됐다. 故 정영환 경사의 형인 정유환(45ㆍ대구시 수성구) 유족회장은 추도사에서 “투철한 경찰정신이 있었기에 화염병 속에서도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경찰로 남아 있어야 했고, 님들의 그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국회에서 화염병 사용방지법도 만들어지고, 경찰의 처우도 많이 개선되고 법과 질서도 많이 찾았는데, 지금 역사는 거꾸로 가고 있어 가슴이 메어진다”며 “법을 준수한 경찰관이 죄라면 우리 경찰과 유족은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5ㆍ3 운동권 대학생이 민주화운동 관련자가 된다면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인 우리 유족과 부상자에게 적법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해 줘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산지방경찰청 대표로 참석한 외사 1계장 이호선 경감(당시 91소대장)은 “이 사건은 이미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된 사안이고 학내문제로 야기된 것이 분명한데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몇 사람들이 사실을 왜곡하여 이런 결정을 내린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 경감에 따르면 순직 경찰관 7명 외에도 10여 명의 현직 경찰관들이 당시의 악몽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전신화상으로 상처를 입은 경찰관들은 정복 부서에서는 아예 근무를 할 수가 없어 사복 부서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화상흉터 때문에 여름철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반 팔 셔츠를 입을 수가 없다. 추도식에 참석한 부산진경찰서 형사과 이덕길 경사는 양팔과 다리의 화상흉터, 목에 호흡기를 대느라 구멍을 냈던 흔적들을 보여주며 “용서와 사과, 화해 후의 민주화운동 인정이라면 우리도 민주화 과정 중의 희생자라고 쉬이 인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논의도 없이 갑작스레 그들의 행동을 민주화로 인정한다면 과연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라며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한다. “이번 보상심의위의 결정으로 먼저 가신 순국영령들의 고귀한 죽음이 헛되게 비쳐지지 않을까 두렵고 오늘따라 유난히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다”며 말을 맺는 이 경감의 눈가에는 어느새 빗물인 듯 눈물이 고여든다. 유족들과 동료경찰관들은 보상심의위의 결정이 황당하고 억울하기만 하다. “불법을 막다 순국한 경찰관들이라며 국립묘지에까지 묻혔는데, 당시 학생들의 시위를 불법이 아닌 민주화 운동이라고 판단한 정부결정은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더욱 억울한 것은 보상심의위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유족 측 어느 누구의 주장과 호소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족 측에서는 본 건에 대한 보상심의위의 검토가 있었던 것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이 언론보도를 통해 발표된 내용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때문에 유족 측은 이 결정과 관련 “청와대를 비롯, 보상심의위원회 등에 공식 항의 방문 및 진정서 등을 제출하는 한편 이 결정을 뒤집기 위한 소송 등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한 현직 ‘화염병 시위 전담 중대’의 반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서울경찰청 제3기동대 35중대 소속 경찰과 전ㆍ의경 106명은 5월 3일 국방부 앞 경비근무를 서면서 중대원 전원이 검은 리본을 달고 출동버스에 ‘5ㆍ3 동의대 방화치사사건 희생 경찰관들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붙였다. 35중대는 시위에서 화염병이 등장하면 가장 먼저 투입돼 화염병 투척자를 검거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경찰기동대로 이동환(37) 경감이 중대장을 맡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 재향경우회는 지난 5월 3일, 부산 동의대사건에 대한 보상심의위의 결정에 항의하는 공개질의서를 위원회측에 전달했다. 김원환(前 경찰청장) 제16대 경우회장과 회장단 등 회원 50여명은 이날 오후 보상심의위를 항의 방문하고 동의대사건 관련자 4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근거를 묻는 내용을 골자로 한 3개항의 공개질의서를 위원회에 제출했다. 경우회는 질의서에서 사학비리에 항거한 동의대 사건이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상징적 사건으로 판단한 논거와 대법원 판결에 의한 자연범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경위를 밝히고 인정결정에 찬성한 위원과 반대한 위원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회장단은 위원회 위원과의 면담은 하지 못한 채 공개질의서만 위원회 보상지원단측에 전달했다. 부산 동의대 경찰관 참사사건 재조명 1989년 3월 11일, 입시부정과 관련한 동의대 영문과 김모 교수의 양심선언에 따라 ‘입시부정행위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구성한 총학생회 간부 50여명이 총장실을 점거해 농성을 시작했다. 이후 5월 1일 교내에서 동의대생 600여명이 ‘노동절기념 청년학도 궐기대회’를 개최한 후, 오후 2시께 50여명의 학생들이 교문에서 500m 떨어진 가야파출소에 화염병 10여 개를 투척하며 기습, 파출소장이 이들을 추격해 주동자 정모(경영ㆍ3)를 검거하자 그 외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파출소장을 폭행한 후 도주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35분께 연행된 동료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100여명이 화염병 50여 개를 투척하며 다시 파출소를 기습해옴으로써 사태의 긴박성을 깨달은 파출소장이 해산경고 후 칼빈소총으로 공포 3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흩어졌던 학생들이 또다시 기습해와 2회에 걸쳐 공포를 발사, 총 3회 24발의 공포 발사로 이들을 해산시켰다. 5월 2일 오후 2시 20분께 동의대생 600여명이 파출소장의 공포 발사를 비난하는 집회를 개최한 후, 300여명이 교문 밖으로 진출해 화염병을 투척하며 격렬한 시위를 펼쳤고 그 과정에서 경찰은 장모(기계ㆍ2) 등 8명을 검거했다. 이후 3시 30분께 학생 40여명이 교문 밖 300m 지점에서 근무 중이던 심모 상경 등 전경 5명을 강제 납치했다. 이에 부산진경찰서장은 3시 35분께부터 납치된 전경들을 구출하기 위해 학생처장과 총학생회측에 협조를 요청했고, 총학생회측에서는 검거된 학생 9명과 전경을 교환하자고 제의해왔다. 서장은 당일 연행된 8명은 가능하지만 5월 1일 연행된 장모의 경우는 “이미 구속영장이 집행돼 불가능하다”며 영장사본까지 제시해 설득했으나, 총학생회측에서 불복해 오후 3시 35분부터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4시까지 장장 12시간에 걸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경찰은 납치된 전경을 방치해둘 경우 전 경찰의 사기저하는 물론, 공권력 부재현상까지도 초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의대 총학생회장 선거 시 납치된 전경 5명의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게 한 후 양심선언을 강제로 시키는 등 선거 득표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학생들이 많이 모이기 전인 새벽 5시에 경찰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시경 제1부국장, 기동중대장 등 19명으로 이미 진압 지휘관 회의를 개최해 진입계획을 토의한 경찰은, 5월 3일 새벽 5시 15분께 진압복 3개 중대와 사복 2개 중대 등 5개 중대 634명을 학내에 투입했다. 진입한 2개 중대가 도서관 건물 앞면과 양옆에 안전매트 및 보호그물망을 설치하는 등 안전조치를 취하던 중 도서관 앞에 집결한 3개 중대의 머리 위로 4층과 7층, 옥상에서 던지는 화염병과 돌, 쇠파이프, 의자 등이 쏟아져 내렸다. 경찰은 가스탄을 쏘며 현관으로 진입, 학생들이 각 계단마다 쌓아놓은 책ㆍ걸상 바리케이드들을 제거하며 6층까지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5시 35분께, 납치된 전경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7층 세미나실 문을 부수고 들어섰으나 납치된 전경과 학생들은 이미 8층으로 옮겨간 후였고 7층 바닥에는 많은 시너와 석유가 흥건히 깔려 있었다. 하지만 방독면을 쓴 진입경찰은 냄새를 맡지 못해 당시 4∼6층의 소화전이 열려 물이 질퍽했던 것처럼 이곳 또한 단순히 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오인했다. 이윽고 구출대원 17명이 세미나실 복도에 집결하는 순간, 8층으로 피한 학생들이 비상계단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시너 2통을 추가로 던진 후 8층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잠궜고, 7층 세미나실 복도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경찰관 3명은 현장에서 질식 혹은 병원이송 중 사망, 3명은 불이 붙은 채 건물 뒤쪽 창 밖으로 뛰어내려 추락 사망했으며, 1명은 병원에서 치료 중 끝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 총 95명을 검거해 살인, 현주 건조물 방화 등의 혐의로 77명을 구속하고 18명을 불구속했다. 경찰청의 반응 경찰청은 보상심의위의 결정과 관련해 법적 타당성 검토에 들어갔다. 이팔호 경찰청장은 “이번 결정이 나온 경위 및 진상에 대해 현재 다각도로 접근을 하고 있다”면서 “감정적 대응은 할 생각이 없지만 진상을 파악,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청장은 특히 “이번 결정에 대해 일선 경찰 뿐 아니라 유족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면서 “이번 결정이 어떤 효력이나 구속력이 있는지 법적 검토를 거친 뒤 합리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재심은 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특히 이번 결정은 불인정이 아닌 인정 결정인 만큼 신청당사자와 제3자, 위원회위원 등 어느 누구도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가 없다. 경찰은 이에 따라 국가기관간 쟁송, 해당 경찰관이나 유족의 행정심판 청구, 경우회 등을 통한 소 제기 등 다각적인 대응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 경찰 내부에서는 “당시 화재로 공무수행중인 경찰관 7명이 사망했고, 불법폭력시위로 규정된 사건을 시간이 흘렀다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법적 정당성을 뿌리 채 흔들고 경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결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 경찰관은 “7명이라는 경찰의 목숨까지 앗아간 이 사건 관련자 모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한데 대한 객관적 판단기준이 의심스럽다”며 “경찰의 사기를 꺾는 이 같은 위원회의 결정은 납득할 수 없고 반드시 재심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추도식에 참석했던 한 동료경찰관은 “유족과 동료경찰관들과는 일체의 접촉도 없이 1년 넘게 학생 측 이야기만 들으며 주관적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이 나라가 싫다”는 말로 울분을 토했다. “파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며 “신청이 들어오면 반드시 심의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만큼 1년을 끌어온 위원회의 고뇌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위원회 관계자의 말이 그다지 책임감 있게 들리지 않는 이 시점에서 경찰청의 대응이 어떻게 전개될지 시선이 집중된다. 취재 차진수ㆍ하재찬 chany@police.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