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메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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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적도, 아군도 두려워했던 사나이

 

  조선 백성들에게 이처럼 엄격했던 이순신, 적인 일본군에게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힘없는 자기 나라 백성한테는 악독하게 굴면서 강대한 외적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었던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냉혹하게 처신했다.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조선군에 사로잡힌 일본군 포로들을 이순신이 인간적으로 대해주어 이에 감동을 받은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조선군에 협조한다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이 장면을 본 전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순신을 ‘적에게도 인자하게 대하는 자상한 장군’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내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한 회원이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산채로 찢어죽였다거나 했다면 어떻겠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아마 ‘불멸의 이순신’을 감동 깊게 보았든지, 아니면 그저 막연하게 이순신을 인자하고 정 많은 사람(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간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듯싶다.


  그 분에게는 유감이지만, 이순신은 실제로 일본군을 두 번이나 붙잡아 찢어 죽였다. 한 번은 산채로, 한 번은 죽은 채로.


  1593년 3월 22일, 이순신은 일본군 2명을 사로잡아 심문하였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 두 명은 올해 3월에 모든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말하였으나 이순신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사지를 찢어 죽이고 목을 베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 사실을 그는 조정에 올리는 장계인 토적장(討賊狀)에서 상세히 기록하였다.


  명량해전에서는 이미 죽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시체를 건져 올려 토막을 내고 그 목을 잘라 돛대에 매달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본 일본군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동료의 복수를 하러 악에 받쳐 달려들었을까? 아니다. 사기가 곤두박질해 전의를 잃고 지리멸렬해하다가 패주하고 말았다.


  또한 명량해전 직후, 일본군이 복수를 위해 이순신의 고향 마을을 습격하여 그의 아들 면을 죽이자 이순신은 자신에게 붙잡힌 일본군 포로 중에서 그 일에 가담한 자를 색출하여 직접 칼을 뽑아 참수하였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나약한 감상-이자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텐데, 내가 그들을 슬프게 하면 안 되겠다는 식의- 빠져 제대로 복수조차 못하던 한국 고전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순신은 결코 그런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기 전 날에는 하늘을 보며 “이 원수(왜적)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고 빌었을 정도로 일본군에 대한 증오와 적의가 깊었다.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본군은 더 이상의 전의를 잃고, 어떻게 해서든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자신들과 7년 동안 싸워왔던 조선군이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 않자, 조선군 장수들과 조선군의 지휘권을 가진 명군 장수들에게 뇌물을 써서 퇴로를 보장받으려는 술책을 부렸다.


  명의 육군 제독 유정은 말할 것도 없고, 수군 제독인 진린에게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 장수들은 수급(조선인 포로들을 죽인)과 무기 등을 뇌물로 보냈다. 적의 수급은 그만큼 적을 죽였다는 증거가 되니, 이를 명나라 조정에 바치면 포상을 받아낼 수 있어서 당시 명의 장수들은 수급을 얻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명군 장수들에게 수급은 웬만한 금은보화 못지않은 보물이었던 셈이다.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순신에게도 고니시는 사자를 보내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싸울 생각도 없으며, 오직 무사히 고국으로 가는 것만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니 무사히 우리를 보내달라."라고 입에 발린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조총과 일본도를 뇌물로 바쳤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총과 일본도를 보자 다음과 같은 말로 일축해 버렸다.


  “지난 7년의 전쟁 동안 우리 군이 노획한 총과 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너희들이 무인(武人)이라면 이따위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히 힘으로 되찾아 가라!”


  실로 박력이 넘치는 표현이다. 뇌물을 가져 왔던 일본군 사자는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한마디 말도 못하고 힘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의를 상실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해 전투를 벌였고,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 7년을 장식하는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다. 250여 척의 일본 함대가 격침되었고, 수만 명의 왜병이 전사했다. 노량해전을 치른 시마즈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노량 해전에서 시마즈 가문의 장수 급 인사가 무려 50여 명이나 전사했으며 총수인 시마즈 요시히로 자신이 탄 기함도 격침되어 간신히 탈출했다고 한다.

 

  철수하는 적을 끝까지 쫓아가 추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이순신의 행동을 두고 어떤 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적을 쫓지 않는다는 동양 장수들의 오랜 불문율을 깨드린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 무슨 책 광고였는데 그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과연 그럴까? 이순신 사후, 일본이 3백년 동안이나 조선의 해안에 얼씬도 못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순신이 가졌던 집념과 노량 해전의 성과를 그렇게 쉽게 폄하할 수 있을까? 아직 미개했던 원시 시대에도 뻔질나게 한반도의 해안을 들락거리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이 왜 임란 사후 3백년 동안은 그렇게 조용했을까?


  혹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너무 잔인하다! 아무리 적이지만 최소한의 인정은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일본군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대하면 되겠느냐?”


  과연 그럴까? 전쟁터에서 적에게 인정을 베풀었다가 그것이 보복이 되어 돌아와 오히려 아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경우도 있다.

 

  송양지인이란 고사성어를 남긴 송양공은 어떠했는가? 적인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널때, 공격하자는 신하의 건의를 무시하고 "군자가 어찌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단 말이오?"라며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다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고 끝내 죽고 말았다.

 

  전쟁터란 본시 죽고 죽이는 장소이다. 내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인다. 그런 철칙을 무시하고 적이 대오를 정비할 때까지 기다려준 송양공의 어리석은 허영심이 더 큰 문제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본인은 자신이 굉장히 자비롭다는 허영심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잃고 조국인 송나라마저 쇠퇴하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어리석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번에는 일본쪽 사례. 히데요시 사후, 에도 막부를 세워 일본을 통일한 장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豊臣秀賴)와 두 번에 걸쳐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大阪) 성이 워낙 견고하여 도저히 무력만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성 밖의 해자(垓子: 적이 성벽을 쉽게 넘어오지 못하게 인공적으로 판 긴 수로水路)를 메우게 해준다면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제안을 했다.


  히데요리는 의심이 들었으나, 이에야스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해자를 메우는 공사를 위해 이에야스의 부하들이 오사카 성으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에야스가 보낸 부하들은 성 밖은 물론 성 안의 해자까지 모두 메워버렸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성의 방어 시설인 성루(城樓)까지 모두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성은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사카 성을 무력화시킨 이에야스는 20만 대군을 몰아 오사카 성을 총공격하였다. 히데요리가 모은 병사들은 끝까지 분전하며 싸웠지만 성을 기능을 상실한 오사카 성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히데요리는 사신을 보내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이에야스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적장(敵將)의 말을 믿는 자, 죽어 마땅하다.”


  결국 오사카 성은 함락되었고 히데요리는 절망에 빠져 어머니인 요도기미(淀君)와 함께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죽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쳤을까? 아니면 ‘약속’을 어긴 이에야스를 원망했을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너희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 돼지가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들에게 달려들지 모른다.”

 

  또, 비슷한 말도 있다.

 

  "너희는 비둘기처럼 순종하되, 뱀처럼 교활해져라."


  송양공과 히데요리가 자초한 상황과 너무나 정확하지 않은가?


  자비심이나 사랑도 베풀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것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자비란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보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냉혹한 제로섬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다. 내가 선량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선량하게 행동하리란 보장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상대방에게 ‘이 녀석은 나약한 놈이구나.’하는 인상을 심어주고 이용당한 채 버려지는 비참한 경우도 너무나 많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그런 경험은 숱하게 했으리라.


  때로는 관용보다 단호함과 엄격함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다. 2백 년 동안 중동을 침범하던 십자군을 몰아낸 것은 살라딘의 관용이 아니라, 바이바르스의 무자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