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메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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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상 반말로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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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이순신은 엄격하고 냉혹한 장군이었다.
   (1) 범법자와 탈주자를 무자비하게 처형하다.

 

  눈부신 위업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하나의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은 이순신을 열렬히 추모하며, 그를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한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거론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인자함’을 연상한다. 이순신은 매우 너그럽고 자상하여 병사들뿐만 아니라 적인 일본군들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해주어 감동을 일본군이 조선군에 투항했다…라는 설정은 KBS1 TV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순신에 대한 일반적인 세간의 인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이순신은 작은 부정도 결코 곱게 보아 넘기지 않는 엄격한 장수였다.

  

  이순신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1582년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로 있을 때, 상관인 전라좌수사(나중에 그가 역임하는 자리) 성박(成?)이 잔치에 쓸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영내의 오동나무를 베러 심부름꾼을 보낸다. 그러자 이순신은 오동나무 하나라도 영내에 있으면 국가의 재산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다고 거절하며 심부름꾼을 돌려보내자 성박이 크게 노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아직 말단 관리인 만호였을 때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원리원칙에 지극히 충실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급자에 복종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직속상관에게 원리원칙을 내세워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무례하며 인간관계에 손상을 끼치는 짓이다. 실제로 이 오동나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박은 발포에 파견된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 서익(徐益)을 매수하여 이순신이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누명을 씌워 파직 시켜 버린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이순신은 계속 원칙을 지키는 고된 길을 자청하여 걷는다. 활터에서 활을 쏘다 자신이 차고 있던 화살통의 아름다움을 탐낸 한 정승이 화살통을 달라고 하자, 그는 ‘이까짓 전통 하나로 정승의 이름을 더렵혀서야 되겠는가.’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정승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잡기 힘든 기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혹여 이것이 뇌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하여 뿌리친 것이다.


  또한 당시 조정의 실세이자 나라 제일의 대학자였으며 이순신의 먼 친척인 율곡 이이가 이순신의 명성을 듣고 만나보려 했으나 이순신은 율곡이 관직에 있는 동안은 만나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재능이 있었지만 승진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 10년 넘게 하급 관직에서 머물러야 했다.

 

  하급 군관으로 있었을 적에도 이랬는데, 승진하여 고관이 된 이후에는 어떠했을까? 그가 직접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에는 잘못한 부하들이나 직무에 소홀한 자들을 처형하고 문책했다는 내용이 수도 없이 나온다.

 

 

  1592년 4월 29일
  본영의 수졸과 본고장 사람들 사이에 도망가는 자들이 있어, 그 길목에 포망장(도망자를 잡는 장수)을 보내어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켰다.

 

  1592년 5월 3일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다.

 

  1593년 2월 1일
  발포진무 최이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기었으므로 군율로써 처벌했다.

 

  1593년 5월 7일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했다.

 

  1593년 7월 13일
  순천에 배속된 거북선의 격군(노꾼)인 태수(太守)가 달아나다가 잡혀 사형에 처했다.

 

  1594년 7월 4일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처형했다.
 
  1594년 7월 26일
  저녁나절에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1594년 8월 26일
  흥양의 포작 막동(莫同)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가 있어서 목을 베어 높이 내걸었다.

 


  이처럼 이순신은 탈주 같은 군기 문란 행위를 결코 용서하거나 가볍게 넘어가지 않고 엄중히 처벌했다. 이순신의 군대에서는 전투 중에 죽은 전사자보다 도망치거나 군기를 어기다가 처형당한 병사가 더 많을 정도였다.

 

  1593년 6월 8일
  각 고을 색리 11명을 처형했다. 옥과 향소에서 지난 해부터 수군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도피자가 많아 거의 1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늘 거짓말로 꾸며대 왔다. 그래서 오늘 형을 집행해, 목을 베어서 백성들에게 보였다.
 
  색리란 관청의 말단 관원이다. 이순신이 처형한 병역을 관리하던 색리들은 뇌물을 받고 병사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이 때문에 이순신 진영은 항상 인력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이순신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그들의 목을 베어 효수한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이 처벌한 것은 병사들 뿐이 아니라 행정 공무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594년 1월 6일
  동헌에 나가 남평의 도병방(都兵房: 군사관계의 사무를 맡은 우두머리 아전)을 처형했다.

 

  1594년 3월 1일
  활터 정자로 올라가 검모포(黔毛浦) 만호를 문책하고 곤장을 쳤다. 도훈도(都訓導)를 처형했다.

 

  이순신은 자기 직무에 태만한 자들에게 벌을 가하지 않고 그냥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순신은 자주 군기물을 점검하고 그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 담당자의 책임을 엄중히 문책했다.
 
  1592년 2월 15일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많이 무너져 석수(石手)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1592년 2월 25일
  여러 가지로 전투 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는 잡아들였으며, 교수(敎授: 각 고을 향교에 있던 종6품 문관직 벼슬아치)를 내어 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중 가장 나쁜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조차 하지 못했다니 우스운 일이다.

 

  1592년 3월 6일
  아침밥을 먹고 난 뒤 출근하여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 갑옷, 투구, 전통, 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진 것이 많아 색리와 궁장, 감고 등을 문책했다.

 

  1595년 1월 22일
  저녁나절에 다락위에 올라가 잘못으로 불을 낸 여러 장수들과 색리들에게 곤장을 쳤다.

 

  이순신이 이렇게 처벌을 가한 횟수는 난중일기 전체를 통틀어 무려 110여 회에 이른다. 이러한 이순신의 처벌은 대단히 엄격하고 잔혹하여 조정에서도 이를 문제삼을 정도였다.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사상자 수가 대단히 적었음을 감안하면 이순신 휘하에서는 평소에 처벌받아 죽고 다치는 숫자는 전투에서 죽고 다치는 숫자보다 월등히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잘 훈련된 병사 하나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순신이 군대를 그처럼 훌륭히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군율을 엄격히 확립했던 그의 방침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전쟁을 피해 도망가거나 부정을 저지르던 자들에게는 잔인한 장수였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잔인함 때문에 오합지졸들을 모은 군대를 이끌고도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질서를 세우기 위한 시범적인 처벌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게 충분한 두려움을 안겨줄 수 있을 정도로 가혹해야만 효과가 있다.

 

  <군주가 민중을 결속시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너무 걱정해서는 안된다. 무질서를 방치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약탈당하게 만드는 군주보다는 소수의 몇 명을 시범적으로 처벌하여 질서를 세우는 군주가 더 낫다. 전자는 나라 전체를 망치는 반면, 후자는 잘못을 저지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를 끼칠 뿐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엄격한 법 집행이 실종되어 내부의 비리와 도덕적 해이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던 구한말 조정의 리더십을 이순신의 리더십과 비교해보면, 위기 상황에서 어떤 지도자가 더 효과적인가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회 내부의 불법과 부패 등의 부조리에 대해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고 관대하게 넘어가던 조선 후기는 어떠했는가? 결국 나라를 잃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지 않았던가? 요즘의 사정도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다.


  강력하고 소신 있게 상벌을 집행하여 본보기로 삼으면 국민들은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좋은 결실을 맺게 된다. 병사들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처형을 서슴지 않았건 이순신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백성들의 열렬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597년 8월 5일 [양력 9월 15일]<계해> 맑다.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인계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이원에 이르러 병마사가 경솔히 물러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옥과(곡성군 옥과읍)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남자와 여자가 부축하고 걸어가는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울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고 했다.

 

  1597년 8월 9일 [양력 9월 19일]<정묘> 맑다.
  일찍 떠나 낙안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 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598년) 12월 7일 기사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한 그가 4월에 고금도에 들어가자 만사를 적절히 조치하여 불과 몇 달 사이에 민가와 군량이 옛날 한산도에 있을 때를 능가한 것을 알고 비로소 그 역량이 남보다 뛰어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유제독(劉提督: 명나라의 육군 제독)이 힘을 다해 적과 싸우려는 뜻이 없다는 걸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를 전적으로 수군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舟師: 수군)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서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 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조차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자료참조

  <이순신과 이완용>

  <난중일기>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