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tional Maneuver Group (OMG)  




 

작전기동단: 소련에서 나토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개발된 전술로서 전차, 장갑차등 고도의 기
동력 있는 장비위주의 부대를 편성해 돌파, 전과확대, 추격 작전에 높은 효율을 보인 전술로 이에 대응하기위해 미국의 공지전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1. O.M.G 개념의 등장
- 서구권에서 O.M.G 개념에 대해 최초로 주목하게 된 것은 도넬리 (C.N Donnelly)가 1982년 9월에 "International Defense Review" 지에 "소련의 O.M.G-나토에의 새로운 도전 (The Soviet Operational Manoeuvre Group-A New Challange for NATO)" 이라는 논문을 기고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수년간 미 지휘참모대학에서 발행하는 "Military Review"에 O.M.G에 관한 일련의 논문이 실린 바 있는데, 이는 당시 소련의 새로운 종심공격교리인 O.M.G에 대한 미국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O.M.G는 소련에서 발전했지만 이를 해석하고 공표한 자료들은 대부분 미국의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지전에 비해 O.M.G 개념에 대해 자료간에 모순되는 설명이나 모호한 점이 많은 것은 이같은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O.M.G는 작전기동군을 의미하는데 그 자체로 특정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특정의 편제가 아닌 전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O.M.G는 대체로 작전술 내지 작전술보다 상위의 개념인 작전전략에 해당하는 개념이며 전구급 공세작전의 일부를 구성한다.

 
O.M.G의 출현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데서 출발했다는 견해가 있는가하면, 나토가 방어시에 전술핵을 사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할 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식의 해석도 존재한다. 혹은 미군의 76년 판 FM-100-5에 규정된 적극방어교리 (Active Defense)에 대한 소련의 응답이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O.M.G는 가급적 핵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공세작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확하게는 소련 스스로의 선제 핵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나토의 핵반격을 감안한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 개념이다.


 
O.M.G의 탄생에 가장 공헌한 인물은 77년부터 84년까지 소련군 총참모장을 지낸 오가르코프 (N.V Ogarcov) 원수이다. 소련은 이미 70년대 초부터 핵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의 재래식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을 다시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핵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을 다시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것은 1차 전략무기제한회담 이후 미.소간에 어느 정도 핵무기 균형이 이루어 졌고, 이 때문에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무기체계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전술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서 신속하게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방향전환의 배경이 되었다. 오가르코프 원수는 이러한 배경하에 고속으로 기동하는 전차부대 일부를 돌파구 형성 후 신속히 종심 깊게 적의 후방을 강습 타격하여 방어체계의 마비를 노리는 전술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 자체로서는 이차대전 당시의 종심전투교리의 한 변형이라고 볼만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주목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핵무기 출현이후 이미 흘러간 과거의 전술이라고 생각했던 개념이 부활했다는 점 때문이다.

2. 소련 종심전투교리의 발전
- 소련에서 O.M.G가 갑자기 평지에서 돌출한 것은 아니다. O.M.G가 나올수 있었던 배경에는 소련 군사과학의 오랜 역사적 경험이 바탕에 깔려있다. 1차대전 당시 고착된 전선에서 끊임없이 진행된 지리한 소모전은 많은 군사전문가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다.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그중의 하나가 트리안다필로프(Triandafillov) 의 '충격군' (Shock Army) 개념이다. 충격군이란 적백 내전기간 프룬제 (Frunze)가 이미 실전에 사용한바 있던 개념인데, 트리안다필로프는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초전에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속으로 기동하여 적의 방어망을 정면에서 돌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고정 편성된 정예부대의 개념을 구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격군이다.



 
트리안다필로프의 충격군 개념이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ii)의 사상에 다소의 영향을 주기는 했으나, 소련군 종심전투(Deep Battle) 교리의 진정한 창시자로 인정되는 인물은 트리안다필로프가 아닌 투하체프스키이다.
투하체프스키의 숙청 후 스탈린은 종심전투교리를 완전히 폐기하고 전차군단을 해체하여 이를 여러 소부대로 분할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 초기에 참담한 패배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1942년 1월10일 일반참모부 훈령 제3호를 통해 실질적으로 종심전투교리의 부활을 의미하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1942년부터 급격히 전차생산량이 증가하여 대규모 기갑부대를 재건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1942년 후반부터는 대규모 기갑군을 독립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943년 이후 새로운 개념 하에 편성된 6개 전차군은 반격작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로써 투하체프스키의 종심전투교리는 실전에서 부활하게 된다. 

 
3. O.M.G
- O.M.G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개념이 소련의 전체적인 공격전술을 대표 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O.M.G는 여하한 형태의 공격전술과도 결합하여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O.M.G는 소련의 종심전투교리의 일부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제파식 공격전술을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동군 개념이 소련군 종심전투교리의 일부 혹은 그 한 적용 형태에 불과하듯이 O.M.G또한 소련 공격전술의 일부 혹은 그 한 적용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O.M.G의 핵심적인 요소는 전선 돌파후 그 간격으로 침투한 O.M.G부대가 종심 깊은 진격작전을 통해 통신시설, 미사일기지, 지휘부 등 NATO의 중요시설을 타격함으로서 나토를 마비시키는데 주안점이 있다. 그 점에서 O.M.G는 기동군이나 전방선견대, 강습대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O.M.G는 전구차원의 공세작전의 일부로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작전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기동군이나 전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강습대 개념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또한, O.M.G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는 이 개념이 물리적 파괴보다 정신적인 마비를 매우 중시한다는 점에서 전격전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70년대 후반부터 교리화되었다는 소련의 "대담한 돌진전법 (Daring Thrust)"은 어떤 것일까? 대담한 돌진전법은 전술핵 공격을 회피하기 위하여 공격축을 분산시키고, 다정면돌파(多正面突破)를 강조하고 있으며, 과감한 돌진으로 적군과 아군이 혼재된 상태를 유발할 것을 의도한다. 적과 아군이 뒤섞이고, 부대가 분산되면 핵으로 공격할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대담한 돌진전법은 집중과 연속적인 타격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종심전투교리의 일부인 제파식 돌파전술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