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다소 황당했던 항공기 납치사고가 있었던 걸 알게 되서 퍼왔습니다.

 

사건 요약하면..

1.일본에서 일본공산주의자가 항공기 납치 후 북한으로 갈것을 요구,

2.한국과 일본은 공조하여 김포공항에 항공기를 착륙시킨 뒤 납치범들에게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이라고 드립침..ㅋ

3.그러나 납치범들은 속지않고 결국 평양으로 몰고 감.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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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일어난 요도호 공중납치사건은 일본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가 일으킨 일본최초의 공중납치사건(하이잭)으로 기록된다. 당시 일본항공(JL)은 보유기마다 애칭을 붙였었는데 납치된 요도(淀)는 오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강 이름이다. 당시 적군파는 일본국내에서의 비합법투쟁을 위해 해외망명기지가 필요하다는 “국제근거지론”에 따라 외국에 조직원들을 파견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때 마침 적군파 의장인 시오미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 때 「H·J」라고 적힌 메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 하이잭사건을 접해본 적이 없는 경찰공안관계자는「H·J」가 하이잭(Hijack)을 뜻한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군파는 이를 계기로 서둘러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드디어 1970년 3월31일 오전 7시 33분 승객 131명, 승무원 7명)을 태우고 도쿄하네다를 이륙하여 이타즈케공항(현 후쿠오카공항)으로 향하던 일본항공 JL351편(B727-89, 기체번호 JA8315)은 승객을 가장한 9명의 탈취범들이 일본도와 권총, 폭탄으로 무장한 채 공중납치당하게 된다. 탈취범들은 조종실을 점거하고 기장에게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도록 지시하는 한편, 남자승객을 창 쪽 좌석으로 이동시키고 나서 준비해간 밧줄로 승객들을 묶었다. 이시다기장은 항공기가 국내선이라 연료가 부족해서 재급유가 필요하다고 탈취범들을 설득, 오전 8시59분 목적지인 이타즈케공항에 착륙했다.  

사실은 법정연료 즉, 최초착륙예정공항(A)까지 비행하여 1회의 착륙접근과 실패접근을 위해 필요한 연료량 + A에서 순항속도로 인근교체비행장(B)까지 비행하는데 필요한 연료량 + B상공에서 30분간 체공하고 접근을 위해 필요한 연료량 + 추가 연료소모 증가 대비량(4~10%)이 탑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양의 연료를 싣고 있었다.                         < A>
                 

 

이곳에서 일본경찰은 탈취범들과 협상을 시도하지만 불발로 끝나고 결국 연료를 채운 댓가로 부녀자와 환자 등 23명의 승객이 석방됐다. 오후 1시59분 요도호는 승객 108명, 승무원 7명을 태우고 이타즈케공항을 이륙했지만 기장이 얻은 지도는 중학생용 지도책에서 복사를 뜬 것으로 항로를 알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지도 구석에는「121.5MC을 청취해라」(※MC란 메가사이클로 지금의 메가헤르츠와 같으며 민간항공긴급용 주파수)라고 적혀 있었고 기장은 이에 따라 비행했다. 기체는 동해상공으로 복상하다가 2시40분, 진로를 서쪽으로 바꿨다. 이를 전후하여 때마침 기체 우측으로 국적불명의 전투기가 나타났고 그 전투기는 기장을 향해서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리면서 강하태세로 들어갈 것을 지시하고는 떠났다. 드디어 요도호가 38도 선을 넘어서자 부조종사는 북한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지시된 주파수로 맞추고는「여기는JAL351편 응답하라」라고 몇 번이나 외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38도선을 넘기는 했지만 비행기는 아직도 한국 측 영공에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여기는 평양진입관제소 응답하라”라는 무선연락이 오면서 주파수를 121.5MC에서 134.1MC로 바꾸도록 지시받고, 이후 관제사의 유도에 따라 좌선회하여 남하했다. 오후 3시16분 평양국제공항으로 여겨지는 장소에 착륙하게 되는데 사실은 평양이 아닌 김포공항이었다. 한국병사가 북한병사 차림을 하고, 여성병사가 “환영 평양도착”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괴한 중 한명이 주기장에 노스웨스트 항공기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 한다. 항공기에 다가선 공항요원에게

「여기가 평양인가?」     “그렇다” 

「조선의 5개년계획에 대해 말해봐라」     “.......?”

「김일성 사진을 갖고 와라」      “......?”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탈취범들은 이곳이 평양이 아님을 금새  알아차린다.

 

훗날 밝혀졌지만 당시 요도호를 관제해 김포공항에 내리게 한 전직관제사 채희석씨(당시 공군 제7항로보안단 소속)의 말에 따르면 “납치당한 요도호를 한국이 다시 납치한 셈”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평양으로 향하고 있던 요도호에 대해 평양관제소로 위장해 김포공항에 내리게 한 것인데 “항공관제사로서 관제범위인 40마일 반경을 넘어선 구역에 들어가 요도호를 관제한 것은 분명한 월권이고 항공법을 위반한 것이다. 조종사에게 해당지역의 정확한 기상정보와 고도, 활주로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자칫 산에 부딪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체는 활주로를 벗어나 있었고 엔진도 정지시킨 뒤라, 다시 시동을 걸려면 별도 보조동력장치(APU : Auxiliary Power Unit)가 필요했다. 일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식음료가 실리면서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북한 측으로부터 「인도주의에 따라 기체가 오면 승객, 승무원을 모두 송환하겠다」라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한국 측으로서는 1969년 12월 10일 승객 47명 승무원 4명을 태운 채 원산으로 피랍당한 대한항공 YS-11여객기사건에서 보듯 자진월북이라고 주장하면서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을 억류하고 있을 때였던지라 강경했다. 마침 그 항공기에는 미국인 승객도 타고 있었던 터라 미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가혹하게 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었는데 일본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결국 북한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4월3일, 교섭 끝에 일본운수성 야마무라 정무차관이 승객 대신 인질을 자처하여 마지막 승객과 트랩 위에서 교체시켜 나누는 형식으로 교환됐다. 이 때 여승무원들도 모두 석방되었다. 오후 6시5분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북한영공으로 들어갔다. 이때도 기장은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없었다고 한다. 북한 영공에 들어가서도 무선응답이나 북한 공군기에 의한 스크램블 발진도 없었다. 날이 어두워서 육안으로 평양교외에 있는 작은 활주로를 찾아서 착륙했는데 그 때가 7시21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용으로 사용했던 미림비행장이었다. 북한 측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라 탈취범들은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들의 무기가 모두 장난감이나 모조품이었다고 한다. 승무원 3명, 야마무라 등 13명도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틀 뒤 4월5일 아침 기장, 부조종사, 항공기관사, 야마무라 차관은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 사건은 일단 수습됐다. 3월 31일 사건발생에서 4월 5일 오전 귀국하기까지 122시간이 걸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70년 6월, 일본국회에서  항공기 강취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일명 하이잭 방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헌법 39조(소급처벌 금지규정)에 따라 탈취범들이 귀국하더라도 이 법률은 적용되지 않지만 기체 강탈, 승객·승무원에 대한 약취·유괴죄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효정지상태에 있다.